• 최종편집 2025-01-2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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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스페인 바르셀로나 콜롬부스 기념 동상 & 광장,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많은 사람들이 현재 스페인과 카탈루냐의 독립운동에 대해 비교적 최근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독립 운동은 서유럽에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문제만큼 오래된, 아주 해묵은 과제다. 카탈루냐의 원주민은 갈리아 인이었고 이후 로마-서고트의 지배를 받으며 서고트인들이 정착했다. 카탈루냐 지역은 대대로 동고트 왕국과 자주 충돌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현 카탈루냐 원주민들의 직접적인 조상은 고트인이다. 

 

그리고 이 고트인들은 프랑크 제국에 정복당하면서 프랑크인들과 혼혈하면서 혼합 민족으로써 정체성을 갖게 된다. 그 카탈루냐 독립 운동의 시작은 유럽 중세 최악의 대전쟁인 독일 30년 전쟁(1618~1648)에서부터 비롯된다. 30년 전쟁 후반대인 1635년에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발발한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리고 있던 스페인 중앙 정부는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한 현 카탈루냐 지방에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고 현지에서 물자를 징발했다.


이러한 조치는 펠리페 4세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재상 올리바레스(Olivares) 공작 가스파르 데 구즈만(Gaspar de Guzman, 1587~1645)에 의해 취해진 것이었다. 올리바레스는 '공평한 과세(Tributación equitativa)'라는 명목으로 지중해 해양 무역을 통해 얻은 카탈루냐의 이익을 부과하는 것이 국정의 핵심적인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 동안 스페인 제국의 군사 활동에 대해 경제적인 부담은 거의 전적으로 카탈루냐가 책임졌었는데 이는 카탈루냐가 해상 무역으로 인하여 각종 부를 취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올리바레스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바로 잡아 이제는 왕국 전체가 보다 '평등한 군사적 부담(Carga militar igual)'을 할 수 있도록 과세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카탈루냐에서도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를 징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으로만 공평한 과세로 불리워졌지 메마르고 황량한 곳에 그나마 중세 양모 산업으로 부흥했던 카스티야 경제가 스페인 왕실의 지속적인 착취로 인해 몰락하다 보니 그저 착취할 대상을 카탈루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스페인 군대는 프랑스와의 국경지대인 카탈루냐에 주둔하며 물자를 징발했는 이는 말이 징발이지 수탈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자 카탈루냐 농민들이 중앙 정부에 불만을 품고 164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수확전쟁(Guerra dels Segador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페인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하니 자치 정부인 제네랄리타드(Generalitat)를 이끌던 카탈루냐 귀족 지도자들은 이를 기화로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기로 결의했다. 

 

제네랄리타드의 귀족 리더들이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하니 이에 수긍한 프랑스 군이 카탈루냐로 진주했고 곧 스페인 군과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전황은 점차 프랑스와 카탈루냐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카탈루냐 귀족들은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고 있는 프랑스에게 자신들이 그 때까지 유지해 왔던 봉건적 특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당시 프랑스 재상인 리슐리외가 이를 단호하게 이를 거절하면서 서로 간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을 추구하던 프랑스 왕정에게 있어 자치권이나 봉건적 귀족들에 대한 특권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프랑스 왕정이 절대왕정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최대의 장애물이었던 것은 지방의 봉건 영주들이었고 프랑스 왕정은 지방 귀족들의 봉건적 특권을 박탈해 그들을 왕권의 통제 하에 두었다. 이는 왕권을 강화시키고 귀족들을 왕권 아래 중앙으로 결속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갖은 노력과 희생을 치러 왔다. 

 

그와 같은 프랑스 왕국이 카탈루냐 귀족들의 봉건적 특권을 용인해 줄 리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한편 카탈루냐에 진주한 프랑스 군은 자신들이 카탈루냐를 구원하러 출병해왔던데다 카탈루냐의 중앙 귀족정을 장악하자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군의 이와 같은 왕의 절대권력 통제 속에서 카탈루냐 인들은 프랑스의 통치 시스템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보다 훨씬 가혹하고 엄격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카탈루냐 인들은 점차 프랑스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자신들이 한 행위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카탈루냐의 귀족 지배층과 농민층이 서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처음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 농민들의 이해 관계는 카탈루냐 귀족 지도자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카탈루냐 정치 지도자들은 봉기한 농민들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반란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더욱 통제되어 돌아가는 것을 본 카탈루냐 농민들은 귀족 지도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카탈루냐 농민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카탈루냐를 프랑스에 내주었다가 더 악화되는 사태를 초래한 귀족 지도자들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결국 농민들은 점차 귀족 지도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된다. 한편 카탈루냐 인들이 점차 비협조적으로 나오게 되니 프랑스 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카탈루냐 측이 구원을 요청해 구원군을 파견했던 프랑스 군은 크게 실망했고 카탈루냐에서 스페인과 싸우려는 의욕도 상실해갔다. 


서서히 프랑스 군은 수세에 몰렸고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카탈루냐에서 프랑스 군을 철수시키게 된다. 이어 스페인 중앙군이 바르셀로나를 포위하게 되면서 공성전에 들어갔고 카탈루냐는 결국 스페인 중앙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아직 프랑스-스페인 전쟁 도중이었기 때문에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카탈루냐는 계속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이는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비교적 관대한 처분인 것이다. 1659년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종결되면서 마침내 피레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 의해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있는 스페인 영토는 프랑스에 할양되었고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있는 카탈루냐의 영토 역시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면서 카탈루냐는 남북으로 갈리게 된다. 현재 프랑스의 피레네 조리앙탈(Pyrénées-Orientales) 지역이 피레네 조약으로 할양된 카탈루냐의 땅이다. 과거 프랑스에 병합된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피레네조리앙탈 지역 역시 카탈루냐어의 사용을 금지당했으며 프랑스어의 사용을 강요당하게 되어 현재는 프랑스어권이 되었다.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게 되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둘째 손자 필리프 공작과,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는 차남 카를 대공을 합당한 스페인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사망한 카를로스 2세의 유언은 필리프 공작을 차기 계승자로 지명했기 때문에 루이 14세는 재빨리 필리프를 스페인으로 보내 펠리페 5세로 즉위시켰으나 잉글랜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이 이에 반발하여 카를 대공을 옹립하게 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Guerra de Sucesión Española)이 발발하게 된다.

 

한편 카탈루냐-발렌시아 지역은 1640년 카탈루냐 반란의 경험으로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 대공을 지지했다. 이들은 카탈루냐가 주요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참전했다. 카탈루냐-발렌시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그 때까지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 받아왔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왕위를 받는다면 계속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반면 절대왕정을 추구하는 부르봉 왕조가 왕위를 이어 받는다면 프랑스 남부 지방처럼 자치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카탈루냐어를 금지당하고 중앙정부가 강요하는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11년 카를 대공이 형 요제프 1세가 갑자기 사망하였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받게 되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전황이 순식간에 바뀌게 된다.

 

카를 6세 한 인물에게 유럽 왕가의 권력이 지나치게 몰리며 비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열강들이 마음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부르봉 왕조의 펠리페 5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승인하면서 전쟁은 수습 단계에 들어갔다. 카탈루냐는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끝까지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싸웠다. 하지만 역시 군사력의 차이가 컸기 때문에 1714년 9월 11일 마침내 바르셀로나가 함락 당하면서 프랑스-스페인에게 카탈루냐는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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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카탈루냐 독립운동의 시작 : 스페인과 카탈루냐 분쟁을 시작부터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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