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의 분쟁은 오랜 민족적, 종교적 반목이 1990년대 초반 보스니아 내전으로까지 번지며 이를 두고 흔히 "유럽판 킬링필드" 라 불릴정도로 20세기의 유럽 역사상 1,2차 세계대전을 제외한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한 내전이었다. 1991년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연대하여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할 것을 선언하고, 1992년 3월의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확정했다. 그러나 인구의 30%가 넘는 세르비아 인들이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나선다. 이들은 분리 투표를 거부하고 보스니아로부터 오히려 독립하려고 하였으며 그 중심은 보스니아 북쪽의 스브르스카에서 시작되었다. 지금도 스르브스카는 보스니아 영토에 있으면서 보스니아 국기를 다는 것을 거부하고 세르비아 국기를 달고 있다.
1992년 4월 6일 EU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자 보스니아는 본격적인 내전상태에 돌입했고 보스니아 내부의 세르비아 인들은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고 내전을 일으켜 보스니아 영토의 약 70%를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세르비아 공화국이 유엔의 제재를 받으면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반군들이 힘을 잃게 된다. 그들은 휴전에 동의하지 않은 채 전쟁을 계속해 나가자 나토는 다수의 무슬림 전사들을 투입한다. 이들은 소위 ‘인종청소’라는 만행을 자행하면서 사라예보를 비롯, 보스니아 곳곳을 파괴하고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이들 과격 무슬림들은 대개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북부 파슈툰 지역에 왔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세력들은 무슬림 전사들과 사라예보 곳곳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무슬림 전사들의 실체는 여전히 보스니아 내에서 베일에 가려져 있다.
나토는 작전명 '딜리버레이트 포스'(Operation Deliberate Force) 로 명명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전면 공습을 개시했다. 1995년 8월 30일~9월 20일까지 나토 소속 폭격기들은 사라예보 일대에 배치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야포 진지와 물자 집적소, 통신시설을 집중 폭격했으며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핵심 시설도 폭격의 대상이 되어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진격은 저지당하게 된다. 1994년 4월부터 수행한 디나이 플라이트 작전은 세르비아계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공중전 등을 수행하였으나,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의 강력한 저항에 나토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크로아티아 공화국 영내에서는 미국의 후원으로 재정비된 크로아티아 공화국군의 '폭풍작전'이 시작되었다. 크로아티아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의 직접적 개입이 힘든 상황이었기에 미국 국무부는 크로아티아군에게 미국 민간군사기업(PMC)을 알선해 주었고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 군대의 훈련을 MPRI라는 업체가 맡게 되었다.
MPRI는 구성원의 상당수가 미군의 전직 고위 장성 출신들이었으며 이들의 훈련을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나토의 전투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국 특사가 세르비아를 후원하던 러시아 대통령 옐친을 만나 압력을 넣으면서 전쟁이 수습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옐친은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에게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후원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도자에게 더 이상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회담에 응하라고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고 보면 러시아의 옐친이 세르비아를 배신한 셈인데 당시 러시아 자체 내정도 보스니아 내전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3년 동안의 내전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마침내 1995년 12월에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내전이 종결될 때까지 230만여명의 난민과 숫자도 가늠하기 힘든 희생자를 내었다.
그러나 유엔의 공식적인 희생자 수는 20만여명으로 되어 있으나 보스니아 당국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들의 조사에 의하면 최대 200여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보스니아 땅과 사라예보 곳곳에 가면 대형 공동묘지들이 많은데 하나같이 사망연도가 1995년이다. 이는 내전에 희생된 분들을 말하고 있으며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희생자 분들이 많다고 한다. 집집마다 가정에 한 명씩은 이 내전의 희생자들이 존재하며 특히 사라예보에는 1992년 5월 25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에 포격을 감행, 보스니아 내 이슬람교도들이 학살되었기 때문에 매년 5월 25일은 사라예보 모든 집들이 초상 분위기라고 보면 된다. 보스니아 전 영토의 약 40%가 묘지라 불릴 정도고 확인된 공동묘지만 해도 6천여 곳이 된다하니 그 참상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사라예보 도시 곳곳에는 아직도 그 참상이 남아있다. 건물에 파여있는 총알 자국과 포탄 자국, 그 아픔을 지우려 시멘트로 땜빵해 보지만 그 흔적은 아무리 땜빵해도 그대로 남았다. 내전의 참혹한 흔적, 1992년 5월 25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에 포격을 감행하여 닥치는대로 쏜 흔적들이다. 파괴된 건물은 사라예보 뿐 아니라 보스니아 전체에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인도주의라는 것을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로 이용하는 자들이 많은 자칭 유럽의 정치인들은 보스니아의 참상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안 두는듯 보인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전쟁이 종료된지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복구가 더디다. 옆 나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등에 비하면 관광지 개발상태가 천지차이라 볼 수 있는데 마치 한국의 60~70년대같은 느낌도 난다. 다만, 치안은 좋은 편이라 여행구역은 밤 늦게 다녀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