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의 화두, 철학의 쓸모
아직 철학이 필요한 까닭에 관한 변론
을사년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국제정세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세도 매우 유동적이어서 올해는 그 어떤 해보다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혜가 필요한 시기다. 미국에서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별세했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대선에 승리함으로써 향후 국제 관계에서 미국 우선주의에 대응해서 강대국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격화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공방, 극우파의 부상 그리고 조기 총선 및 정권 교체 가능성과 총리 사퇴로 인한 정부 붕괴로 인한 정국 혼란으로 유동적인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중동은 시리아 반군의 승리,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 전쟁이 아직 향배를 알 수 없어 여전히 불안감을 지니고 있다. 중국의 경기침체와 북한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개입, 일본의 자민당과 공민당 연립정권의 총선에서의 과반수 획득실패 등도 향후 동북아의 정세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관심사이기도 하다. 한국도 불투명한 정국으로 인해 당분간 정치적 혼란도 불가피할 것이고, 대다수의 많은 한국인들은 이러한 혼란이 조속히 종속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필자도 이러한 국내외적인 상황을 보면서 올해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하나씩 지혜롭게 해결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자에게 필요한 지혜란 무엇일까? 필자는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결국 철학이 그 지혜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학문은 지식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지혜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철학과 다른 학문의 차이다. 그런데 철학은 다른 학문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문을 철학에서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순수 철학은 이론철학이기 때문에, 철학의 고유한 영역에 속하는 반면, 실천철학은 이론을 실재에 적용한 철학이기 때문에 개별학문과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물론 오늘날 개별학문도 매우 발전해서 독자적으로 새로운 이론과 실천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인해 마치 철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개별학문이 지나치게 세분화 혹은 전문화되다 보니 같은 전공 분야에서도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자신의 분야 이외에 다른 분야를 모르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나친 세분화가 오히려 우리의 통합적 사고를 방해하면서 숲을 보려고 하지 않고 나무만 보는 꼴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전문화로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이와 반대로 자칫 독단론 혹은 자만심에 빠질 수 있다. 혹은 그들은 한 나무만을 위해 숲을 태워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다. 오히려 나무를 모른 사람은 숲을 태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어느 쪽이 더 지혜로운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철학은 지혜의 산물이지만 모든 지식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철학자는 모든 지식을 전문적으로 개별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개별적으로 분산된 다른 학문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자신의 철학 체계로 끌어들여서 파악한다. 거기에 논리와 논증 그리고 방법론이 철학자별로 수반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철학이 일반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철학은 분명히 그 발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학문으로서 철학의 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철학의 쓸모가 언제나 그 시대의 흐름에 상응해서 유용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철학은 과거의 것이지만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이 여전히 있는 철학도 있지만, 이와 반대로 그렇지 못한 철학도 있다. 또 과거의 철학이 현재의 철학보다 더 많은 자양분을 지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어떤 철학이든지 하늘에 떨어진 것이 아닌 한, 현재의 철학은 과거의 철학을 재구성하거나 비판적으로 분석-종합하거나 하기 마련이다. 이를 간과하는 철학자는 사실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철학의 양상은 특정한 철학사상에만 치우친 나머지 다른 철학이나 이론, 혹은 다른 분야와 연관된 치열한 논의를 좀처럼 찾기 어렵다. 모든 것을 특정한 철학으로 환원하는 풍토가 만연하다 보니 – 요즘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기는 하지만 – 정작 새로운 이론이나 해석을 거부하는 모습도 종종 나타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철학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그런 방식으로 관습화되어 구조적으로 제도적으로 굳어져 왔다. 한국에서 학부 시절에서부터 그 이후에 과정까지 다 거치고서도 철학의 쓸모에 관해 진지한 고민과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공허한 말들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철학에 대해 무슨 쓸모를 논할 것이 아니라, 철학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필자는 철학이 무엇인지가 철학자별로 어쩌면 모두 다른 데, 철학이 무엇인가 정의하기가 쉬운가라고 반문하면서, 오랫동안 그렇게 화두를 던졌다고 해서 과연 만족할 만한 답변을 본인은 내렸는지를 재차 물을 것이다. 오히려 철학의 역할, 다시 말해 철학의 쓸모가 무엇인지를 화두로 던지면 어느 정도 답변이 나올 것이다. 철학의 쓸모란 철학이 사유를 전제로 한다면, 철학은 인간의 사유를 변화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는 뜻이고, 철학사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철학이 개별학문과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통합적 사고를 함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철학은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지침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럴 때 철학이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판을 통해 삶의 지혜를 제공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원천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이때 조건이 부가된다. 누구에게나 다 동일하게 철학이 그 원천을 제공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그것을 위해 노력하면서 오직 진리에 대한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이를 향유할 권리를 갖는다. 그런데 철학의 이러한 특성이 상대적으로 진리보다 거짓이, 지혜보다는 어리석음이 들어갈 여지를 만든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보면 철학이 쇠퇴기에 들어갈 때 철학에 대한 비판이 사라질 때 종종 출현하는 현상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극단주의, 광신적 맹목주의, 불통과 오만함, 편견과 선입견, 자기 과시욕 등이 판을 치는 것은 철학의 부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철학이 부재한다는 것은 마치 서양 중세의 암흑기와 같은 어둠이 빛을 가리고, 어리석음이 지혜를 덮어버리는 것과 결단코 다르지 않다. 이것은 그 정도로 한국인들의 삶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음을 증명하고, 아직 삶을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영위하기 위한 수단과 이에 합당한 목적이 정립되어 있지 않음을 또한 증명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로만 떠들지 그러면 왜 아직도 그런지에 대한 근거 혹은 해법은 명료하게 그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조차도 지혜롭다기보다 오히려 더 어리석은 경우도 많다. 단적인 예가 그들 중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보다 우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좀 있으면 바로 드러나는데도 그 순간에 회피하려는 얄팍한 태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소위 엘리트들 사이에서 종종 일어나는데, 대부분은 그다지 깊이 있는 지식보다 얕은 지식을 가진 오만한 자들이다. 깊이 있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겸손하지, 단연코 오만하지 않다. 또 누가 묻더라도 이를 회피하거나 하지 않고 담담한 태도로 진솔하게 답변한다. 그런 사람은 때론 날카롭게 비판을 하면서도 때론 온화하게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고 그 의견을 존중한다. 이것이 지혜롭지 않는가!
철학의 역할, 혹은 쓸모는 우리가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기보다 과연 어떤 것이 있을지 탐색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바로 그 지점에서 철학의 출발점은 마련된 셈이라고 하겠다. 철학은 무용하지 않고 쓸모 있다. 다만 그 쓸모를 쓸모 있게 만들지, 쓸모 없게 만들지는 오직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을 뿐, 철학이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만약 알려준다면 그건 철학이 아니라 다른 학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