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같이 자유의 가치가 소중한 적은 없을지도 모른다. 지난해 12월 3일 이전에는 모든 국민들이 그냥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란 사람이 12월 3일 야밤에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모든 국민을 놀라게 하였다. 비상계엄은 전시상황처럼 국가의 질서가 무너질 위기 상황에서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강력한 조치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비상계엄 선포는 그와는 다르게 선포되었다.
1980년의 비상계엄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의 행사였다. 지난해의 비상계엄은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선포했다. 국회를 무장한 군인들이 침입하고, 선거관리위원회에도 침입했다. 선거관리위원회 침입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가 부정선거였다는 것을 조작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비상계엄의 선포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다. 국민을 향해 총칼 앞에 숨죽이고 살라는 메시지의 전달이다.
우리가 밥 먹듯이 내뱉는 말이 자유민주주의란 말일 것이다. 여기서 자유란 무엇일까? 국민 중 일부의 사람들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반대되는 말이 곧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자유주의는 냉전시대의 반공주의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유는 반공과는 거리가 멀다. 공산주의가 공산당이라는 일당 독재 체제라고 간주한다면, 탄핵당한 윤석열 대통령이 꿈꾸는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의 일당 독재를 꿈꾸고 있었다.
나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국가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몰아붙이니, 그야말로 공산당 일당 독재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의 차이를 배제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독재이다. 그는 입만 열면 자유를 들먹이지만, 사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어린아이의 자유처럼 유아적인 수준에 머물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은 것을 보면 이 사회는 무척 심한 중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최근에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다시 읽어보았다. 어쩌면 그의 분석이 우리의 상황과도 유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프롬은 그러한 개인의 불안과 무력감이 개인을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었다고 진단한다.
그것이 나치 지배하의 독일 시민들의 병리적인 의식으로 진단했다. 인간은 자기 보존의 욕구가 강하기에 사회적인 고립감을 견디지 못한다. 여기서 개인은 자기 자신의 참된 인간성을 발휘하는 생산적인 인간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결국 권위에 복종하게 되고, 자기 스스로 권위적인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가진 합리적인 이성을 개발하고 타인과의 연대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발휘함으로써 개인의 힘은 증대가 되고, 그것이 곧 생산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개체화되는 과정에서 개인의 무력감이 깊어질 때 인간은 힘의 증대와 개체화 과정의 불균형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개인은 자유를 박탈하더라도 불안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면, 자유에서 벗어나 그 관계 속으로 도피하거나 복종으로 도피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을까? 자유민주주의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기보다 우리 내면에 있는 부처나 예수님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이 무주상 보시로서의 자비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가페적 사랑이라면, 그 둘은 모두 하나이다.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는 한 우리는 그들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수단으로 전락된다. 그들이 주입시키는 양심이라는 초자아 역시 지금 여기 그대로 온전한 우리의 삶을 파괴시킨다. 그 결과는 초라하게도 익명의 권위에 의존하는 자동기계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전락될 뿐이다.
서구의 역사에서 자유는 근대에 등장하였다. 중세 사회에서는 자유라는 개념이 등장할 필요가 없었다. 저마다 사회 공동체 내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업의 발달과 함께 근대에 등장한 개념이 자유였다. 그러한 자유의 증가는 새로운 의존을 낳았다. 프롬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개인과의 모든 유대관계를 끊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부터 개인의 고립감과 무력감이 증대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그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에서 무엇에로의 자유라는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기를 권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적극적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적극적 자유는 휴머니즘적 자유이다. 사물을 소유한다든가, 시장지향적인 비생산적 자유가 아니라, 사물을 존재 그 자체로 보는 생산적 자유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사회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회에 적극적인 참여와 연대를 통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자유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권위주의적 종교를 거부하고 휴머니즘적 종교를 강조한다. 휴머니즘적 종교란 바로 내 안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