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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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바스크 주의 깃발을 내건 모습, 출처 : 필자가 스페인 바스크 주의 주도(州都) 빌바오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

 

바스크 민족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민족 중 하나로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등 게르만·라틴족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문화를 유지해 왔다. 바스크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바스크어는 유럽의 다른 언어들과 이질적이면서도 어느 어족에 속하는지 알 수 없는 계통상의 고립어로 들어간다. 현재 스페인에는 약 260만 명의 바스크인이 살고 있고 프랑스에는 약 30만 명이 살고 있다. 


스스로를 바스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정도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고, 조상 중에 바스크인이 있거나 바스크 계통의 성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추가한다면 이보다 더 많아진다. 또한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중남미 멕시코와 콜롬비아, 칠레, 필리핀, 아르헨티나, 카나리아 제도 등 해외에도 바스크 인들이 상당수 이주했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스페인 이름인 가르시아(Garcia) 같은 이름은 바스크계 이름이다. 이런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을 추산한다면 바스크인의 숫자는 1억을 넘긴다. 

 

스페인 해외 식민지들이 독립한 이후에도 상당수의 바스크인들이 중남미 등지로 이민가기도 했다. 칠레는 바스크계 성씨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인구의 27%에 달하며, 페루는 18%,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는 10%, 콜롬비아는 5%, 멕시코는 2%가 바스크 혈통을 지녔다고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 바스크인들의 특이한 사항이 있다면 붉은 모발, 녹색 눈동자와 헤이즐색 색깔의 눈, 벽안 등을 가지고 있으며 혈액형 중에서 O형이 많은 편이고, Rh- 형 혈액형 또한 유달리 많다는 것이다. 

 

유럽 내에서 Rh- 형 비율은 16% 정도라고 하는데 바스크인들은 무려 36%의 비율을 갖고 있다. 즉, Rh- O형이 흔한데, 적혈 모구증 때문에 유산 및 사산율이 높아 다수 민족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넓은 의미에서 표기되는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 영토의 남부 바스크 지방과 프랑스 영토의 북부 바스크 지방에 걸쳐져 있는 총 7개 지역을 통틀어 지칭하고 있다. 


바스크 주의 표어는 '일곱이서 하나(Zazpiak Bat)'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정작 이 중 3개 주가 프랑스 영토, 4개의 주는 스페인 영토에 속한다. 바스크 주의 면적은 20,947㎢, 인구는 약 320만 명 정도이다. 이들 주(州) 중 현재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곳은 남부 바스크 지방이다. 이들 남부 바스크지방 중 기푸스코아(Gipuzkoa / Guipúzcoa), 아라바(Araba / Álava), 비스카이아(Bizkaia / Vizcaya)  등 3개의 도(Province)로 구성된 바스크 광역 자치주로써 좁은 의미에서 바스크 지역은 이 곳만을 지칭하고 있다. 분리주의 성향을 가진 지방이라 한다면 이 바스크 자치주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자치주 지역에 거주하는 바스크인들은 최소 B.C 3000년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은 단일 정체성과 문화가 분명한 단일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근이 피레네 산맥과 마주하고 있는데다 그 지세가 험준하여 이동이 쉬운 지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스크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선주민들 중 하나라 볼 수 있겠다.


다만 바스크인들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다양한 설들이 내려오고 있다. 확실한 것은 유전자 분석으로 볼 때 신석기 시대에 피레네 산맥 부근에 수천 년간 정주민으로 살던 원시 바스크인(Proto-Basque people)과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이주민인 라틴 종족들 간에 혼혈화된 후손이라는 것이유력하다는 가설이다. 이들 원시 바스크인들은 여타 토착 서유럽 인들과 거의 동일한 하플로그룹에 속하는 엄연한 코카소이드계 인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해당 지역에 정착한 후 수천 년간 유럽의 여타 민족들과 거의 섞이지 않아 문화적, 언어적 정체성이 유달리 강하게 남았을 뿐이라는게 명확한 분석이라 하겠다. 혈액형 비율에 있어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이 또한 오랜 고립으로 인한 것일 뿐 특이한 사항은 아니며 고대 크로마뇽인의 마지막 후손이나 심지어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의 후예라는 가설도 있었지만, 유전적으로 볼 때 그저 평범한 서유럽 인종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바스크와 같이 고립된 언어와 정체성을 가진 민족은 고대 로마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드물지 않았었다. 이탈리아 반도 내에 있던 에트루리아어도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언어가 아니었고, 알프스 산맥 동부에서 쓰이던 라이티아어도 인도유럽어와 다른 어느 계통에 속하지 않은 고착어 수준이었다. 그나마 그리스-로마 문명에 가까웠던 덕택에 기록에 남은 것이고 이러한 기층 언어들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들이 확산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다소 피레네 산맥 아래 고립된 지역에 살고 있던 바스크족의 언어만 서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바스크 지역의 선사 시대 유적을 통해 보면 전통적인 바스크 인의 거주 지역은 피레네 산맥을 중앙에 두고 프랑스의 가스코뉴와 아키텐, 스페인 북부 산악 지대와 해안에 걸쳐 있었다. 바스크인들이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고 정착민으로 거주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스크인의 조상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 시대 유적들은 청동기 시대에 점점 산지로 이동하며 요새화되는데, 이는 다른 유럽계 민족들과의 마찰이 빈번하여 이를 피해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하기 이전부터 바스크족 어부들은 대서양에서 참치잡이로 부를 축적했었다. 그러한 와중에 이들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비공식적으로 여러차례 갔다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참치잡이를 위해 먼 바다까지 갔다가 우연히 아메리카에 도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5세기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 것 역시 당시 포르투갈의 국가 기간 산업이었던 어업을 후원한 엔리크 왕자가 참치 어장을 찾아 어선을 이용해 대서양 일대를 헤집다가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고학 연구를 통해 관련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면서 사실임이 입증된 빈란드와는 달리 바스크인들의 아메리카 도달설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된 바가 없어서 아직 가설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이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매우 강력한 증거도 존재하고 있는데, 캐나다에 있는 바스크족의 포경기지 유적인 레드베이 기지를 근거로 볼 수 있다. 


이 유적을 캐나다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하여 분석해본 결과, 아무리 건설 시기를 이르게 잡아도 1530년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즉, 1492년에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콜럼버스보다는 진출이 늦었던 셈이다. 현재까지 콜럼버스보다 더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음이 분명히 밝혀진 유라시아계 사람들은 10세기경에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일대를 탐험한 바이킹들 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도 그 정도의 시기라면,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아메리카 진출을 시도한 건 맞다. 우선 바스크인들이 스스로 주장한대로, 바스크인 포경업자들이 타국의 지원도 없이 독자적으로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정받고 있다. 바스크족은 참치 뿐만 아니라 대구잡이로도 유명한 민족이다. 당장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생선 요리가 말린 대구인 바칼랴우(Bacalhau)라 볼 수 있다.


특수부대에서 쓰는 베레모가 바스크인들의 전통 모자인데, 그 때문에 유럽에서는 바스크인들이 강한 불굴의 전투 민족으로 유명하다. 많은 전쟁을 거치며 바스크인을 공격하는 군대는 이기든 지든 결과적으로 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이유다. 고대 로마의 군단이 바스크족을 동맹 부족으로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이베리아 반도 곳곳의 다른 켈트족과 이베리아 종족들의 성들을 복속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로마 군단병으로 입대해 카이사르와 함께 오늘날의 잉글랜드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도 활약했다. 

 

카를루스 대제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의 군대 또한 바스크족에게 크게 패해 피해를 입었고, 이슬람 제국이 서고트 왕국을 침공해 전선이 피레네 산맥의 북부 지역까지 밀렸을 때도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방어하여 이슬람 세력을 격파했다.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의 준동에 프랑스 측 용병으로 참전하여 활약한 바 있으며, 위그노 전쟁에서는 프랑스 왕실의 외가로 참전하여 왕가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점령 당시 프랑스군도 바스크인들의 소규모 유격전술로 인해 지배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전술을 두고 스페인어로 '전쟁'을 뜻하는 "Guerra"에 '작은(small)'을 뜻하는 접미사 "illa"가 합쳐진 이름인 게리아(Guria)라고 불렀다. 이는 후일 게릴라 (Guerrilla) 라는 어원의 유래가 되었다. 바스크인들은 최근까지도 ETA 등 테러 단체로 활동한 바 있다. 이들은 이슬람을 상대로만 800여 년 동안 방어 전선을 형성하였고, 통합 스페인 왕국이 창립된 이후 16~17 세기 유럽에서 당대 최강이었던 스페인의 육, 해군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바스크인들은 고대 로마의 시민으로 동화되면서도 여전히 많은 바스크인들은 산지에 있는 성들의 자치권을 얻어 고유 문화를 지키며 살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로마인으로써 완전히 동화되었다. 로마가 멸망하고 난 한참 이후까지도 바스크의 전통 종교로 인해 카톨릭으로 개종이 상당히 느렸다가 중세 초기에 유럽의 대세를 따라 결국에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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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 바스크 분리주의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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