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년 9월 11일 루이는 아헨에서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에 의해 공동 국왕 겸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814년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는 아헨에서 늑막염과 우울증 등으로 사망했고 루이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상속받고 이후 로마로 건너가 Vivat Imperator의 Ludovicus라 하여 황제로 축성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뒤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의 서자인 드로고 3세(Drogo Ⅲ)는 메츠의 주교에, 후고(Hugo) 생 퀘틴 수도원의 원장에 임명하였다. 자신의 친척들인 조카 베른하르트의 친손자들 아달하르트(Adalhard)와 왈라(Wala 또는 Walacho), 테오도리히(Teodorihy)는 엑샹 라샤펠 수도원에 보낸다.

또한 각 수도원과 성당에 각종 면세 혜택을 주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성직자들과 친인척인 니타르트(Nitart) 등 친척을 중용하였다. 그 밖에 유산 상속을 우려하여,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과 친척들을 결혼 협정을 맺기 위해 다른 지역이나 인접국가로 시집보내는 대신에 수녀로 만들어 수녀원에 보냈고, 몇몇 이복형제들과 조카들, 친척들을 모두 수도원에 보내 사제와 수녀로 삼았다. 또한 아버지 카를루스 대제의 첩들도 수녀로 만들었다. 이는 형제들을 황위와 권력에 도전할 수 없도록 정치적인 보복, 혹은 견제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며 이러한 부분은 루이 본인의 신앙심과는 별개의 부분으로 판단된다.
루이는 나이가 들수록 대외 활동보다는 신앙에 의지하려 했다. 이는 형제들이 사망하고 그가 물려받은 황제의 지위와 권력은 루이가 형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정통성이 크게 결여된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심리적인 위협에서 방지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루이의 신앙심과 가까이 하려는 정책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채용하여 정치를 위임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영주와 기사들이 성직자를 고위직으로 등용하는 정책에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영주와 기사들의 불만은 루이의 사망 이후에 드러나게 되는데 이 때 루이의 정책과 반대되는 정책을 펼친 루트비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따라서 장남 로타르나 차남 피핀은 아버지 루이의 정책을 이어 받으려다가 귀족들이 이에 찬성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피핀은 아버지의 정책을 변환시켜 귀족과 기사들이 고위직으로 등용하는 것에 있어 우선순위로 두었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바이에른 대공으로써 첫 중점 과제는 카를루스 대제의 유언장에 제시된 조항들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조항 중에서 루이는 제국을 분할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보았다. 즉위 직후 루이는 814년 8월 로타르를 바이에른 국왕으로, 피핀을 아키텐 공작으로 봉했다. 또한 카를루스 대제가 813년 자신에게 물려주었으며 둘째 형인 피피노 카를로만의 자리인 롬바르드의 왕위를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 베른하르트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상스(Sangs)의 테오델린트(Theodellint)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상스 백작 아르눌프의 몫으로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루이가 상속령을 서두르게 된 이유는 아헨에서 루이 1세는 성당에서 궁정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나가다가 지붕이 붕괴되어 죽을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루이는 왕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왕위계승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루이와 에르망가르드(Ermangard) 사이에서는 이미 장성한 세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모두 프랑크 족의 전통에 따라 왕국을 동등하게 분할 상속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르고 있던 루이는 로마제국과 같은 통일적인 영토의 유지를 통해 제국 내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성직자들의 정치적 조언 또한 존중하였다.
이러한 원칙적인 부분과 동등한 분할 계승, 장자에 의한 단일한 계승을 적절히 절충했고 814년 7월 루이는 ‘황제칙령’이라 불리는 상속 계획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장남 로테르는 아버지 루이와 공동 황제로 대관식을 받고 루이 1세가 사망하면 제국 대부분을 계승하며 차남인 피핀은 아키텐 및 인근 지역, 셋째인 루트비히 2세는 알자스-로렌과 바이에른 및 남독일 지역, 그리고 루이의 형이었던 이탈리아 왕 피핀 4세의 아들이며 루이의 조카인 베른하르트는 이탈리아를 계승할 것을 천명했다. 이렇게 하여 루이는 동등한 분할상속 대신 장자에게 황제 특권을 부여하고 왕이 되는 동생들이 황제에게 종속되는 방식으로 제국의 분할을 방지하고 제국의 틀을 유지하고자 했다.
817년 7월에 루이는 아헨의 제국 의회에서 피핀을 아키텐 왕으로 봉하고, 바이에른을 루트비히에게 주도록 정하고 다시금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했다. 당초 그는 아버지의 사후 아들 형제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는 프랑크 족의 전통 살리카 법 대신 장자 상속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는 일찍 다른 아들들에게는 일부의 영지만을 봉하고 장자인 로타르에게 넘겨주어 장자상속을 확립하려 했지만, 일부 관료들만 루트비히 경건왕의 뜻을 이해했을 뿐 다른 아들들은 자기 몫의 봉토를 차지하려 했고, 대다수의 귀족, 궁재들이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으므로 루이의 뜻은 실패하고 만다.
베른하르트는 루이의 군대와 대치했으나 숙부인 루이는 화해하는 척 하고 베른하르트를 불러들인 뒤 두 눈을 뽑고 근육을 지져 불구로 만들어 추방했다. 이어 로타르를 롬바르드의 군주로 봉하고 루트비히 2세에게 바이에른 분국왕에 봉했다. 사실 루이 1세가 베른하르트에게 실명형을 내린 것은 그를 처형하지 않고 살려주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이에 대한 후유증으로 인하여 818년에 사망했고 루이는 이후 오랫동안 베른하르트를 살해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822년 유월절 때 아르덴(Arden)의 부지에(Vouziers)와 아팅기(Attigny)의 수도원에서 교황 파스칼 1세에게 이탈리아의 베른하르트가 죽은 것과 충실한 조언자인 베네딕트의 병사 등 대해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는 공개 참회와 속죄 의식을 올리기도 했다. 베른하르트의 죽음에 대한 공개적인 참회 의식에 대해 이는 왕국 내에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먼저 성직자들은 루이의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옹호했던 반면 귀족들과 제후들은 황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황제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냐며 조소하였다.
815년 루이는 장남인 로타르 1세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고 아헨(Aachen)에서 즉위시켰다. 이어 루이는 공식적인 상속령을 발표하여 로타르는 총괄 국왕 겸 황제로, 피핀은 아키텐과 가스코뉴(Gascony), 툴루즈, 카르카손 (Carcassonne), 오툉(Autun), 아발론(Avalon)과 낭베르(Nangber)를,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과 슈바벤 및 작센 등을 상속령으로 재정립하게 된다. 그리고 분국왕으로 임명된 세 아들의 사후 세 아들의 아들들이 상속하는 것으로 정했다. 818년 4월 17일 루이는 장남 로타르 1세에게 제국의 제위와 함께 롬바르드를 넘기기로 정하고 로타르를 롬바르드의 왕으로 임명한 뒤 교황 파스칼리스(Pascalis)에게 보내 축성과 황제의 제관을 받게 하였다. 이에 루이는 로마 헌법(Constitutio Romana)을 선포, 황제가 로마에 대한 통치권이 있다며 교황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한다.
이는 바로 제국칙령(Ordinatio imperii)이라는 명칭으로 프랑크 제국의 성문법으로 남겨졌다. 이 때 루이는 에르망가르드와의 사이에서 왕자를 더 낳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가 에르망가르드 황후가 818년에 사망하자 4개월 후 바이에른의 유디트(Udite)와 재혼했다. 821년 루이의 스승이자 조언자이기도 한 베네딕트가 사망했다. 같은 해 황후 유디트 바이에른에게서 딸 기셀라(Gisela)와 822년 6월 13일 4남 카를 2세가 출생했다. 루이의 막내아들 카를은 루이 1세가 왕비 에르망가르드 사망 후 새로 왕비로 맞은 유디트의 아들로 제위와 왕위를 보장받은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 2세와는 배다른 형제였다. 루이는 제국 단일성 유지가 흔들릴 위험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디트의 아들인 카를에게도 일정한 영토를 나누어 주려고 했다. 한편 루이의 조카 베른하르트가 사망하면서 세 아들 사이의 위계적인 왕위 계승 계획이 큰 도전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디트는 피핀, 루트비히 2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크 족 전통에 따른 동등한 분할 상속을 주장했다. 유디트의 움직임에 격분한 공동 황제 로타르는 817년의 황제칙령에 대한 어떠한 개정도 거부하면서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