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인 1991년 12월 소련으로부터 인수 받은 군사 장비들과 병력을 재편성하여 우크라이나만의 독자적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면서 12월 6일에 우크라이나 국방부을 개관하는 개관식 때 국군 창설을 발표했다. 그래서 매년 12월 6일은 우크라이나 국군의 날로, 올해 얼마 전 우크라이나 국군의 날은 30주년을 맞이해 성대히 행사를 거행했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군의 16개 군 관할 구역 중에서 키예프, 오데사, 자카르파티아 등 3개의 군 관할구를 그대로 인수하였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군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해당 부대들은 즉각 우크라이나의 군복으로 갈아입고 독립 후, 우크라이나 첫 세대가 되었으며 현 우크라이나 국방부 주요 인사들이 바로 당시 우크라이나 군 1세대들로 구성되고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 군 1세대들의 병력은 78만 명, 전차 6,500대, 전술기는 1,500대로 우크라이나에 주둔했었던 소련군의 전력을 그대로 이전받았기 때문에 군사력이 막강했으며 전체 유럽 내에서의 그 위상을 놓고 본다면 러시아를 제외하고 영국, 프랑스 다음이었을 정도로 대단한 강군이었다. 더불어 핵무기로만 놓고 보면 소련 다음으로 개수로는 영국, 프랑스보다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서유럽은 1994년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를 통해 영토주권의 보호와 더불어 경제 원조를 약속하고 핵무기를 폐기하는데 합의했다.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폐기하기 어려웠으므로 러시아나 서방의 도움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크랍추크(Леонид Кравчук)는 우크라이나 내 만연하고 있는 경제 위기로 인해 막강한 군대를 운영하는데 부담이 생기자 수백 대의 전차를 제외하고 도저히 가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재래식 무기들은 폐기, 혹은 제3세계 등에 헐값으로 내놓게 되는데 이러한 우크라이나가 헐값에 내놓은 무기를 가장 많이 사간 나라가 바로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소말리아였다.
나머지는 비축하면서 사실상 현역으로 남는 중무기들은 10분의 1 수준으로 급격히 축소되었고 무기 개발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있는 무기들을 개량해서 재활용했다. 이런 무기들의 성능이 당연히 좋을리 없었고 핵도 폐기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국방은 사실상 미국을 비롯한 나토에 맡긴거나 다름 없었다. 다만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국토에 인구가 약 4천만 가량 되었으니 군사들의 머릿수를 채우는 것은 가능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나토와 긴밀히 협조했다. 2003년 이라크전 이후 이라크에 다국적군의 주둔이 시작되며 우크라이나는 동구권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전투병들을 파견한다. 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친(親) 서방으로 기울게 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 체제를 찬성하면서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특히 러시아에 해군기지를 대여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면서 러시아를 더욱 자극했다.
그러나 2010년 2월 25일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Виктор Янукович)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러시아와의 냉각된 관계가 급속도로 해빙되기 시작한다. 같은 해 4월, 문제가 되던 해군기지를 러시아에 대여할 수 있게 취소 결정을 철회하고 2030년까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의 해군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연장하였다. 게다가 2013년에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우크라이나 군의 군축 협상에 합의했고 10월에는 징병제를 폐지했다.
약화되었었지만 그나마 버티고 있었던 우크라이나 군의 군사 무기들이 삽시간 폐기되고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돌리다보니 당시만 해도 거의 50만에 달하던 정규군이 20만 남짓으로 줄어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이른바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를 두고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3대 만행"으로 이 사건이 들어가는데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2013년에 폐기된 무기를 아프리카에 내전 중인 국가들에게 팔고 그 자금은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던 최악의 "대통령 방산비리"가 터져 엄청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어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해 야누코비치 정권은 붕괴되었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과 돈바스 전쟁이 발생하자 군대보다 더 치명적인 내부 분열이 터지게 된다. 우크라이나 영토 내부에는 친러 계열, 즉 러시아계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상당수 분포하고 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이나 크림 지역은 거의 80%에 달할 정도였고 수도 키예프에서는 약 20%, 옛 소련의 군항인 오데사에는 러시아계가 45%에 달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가 소련에게 독립하면서 소련 주민이었던 자들이 우크라이나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남은 사람들인데 거의 반 강제적으로 소련 국적이 아닌 우크라이나 국적을 갖다시피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친(親) 서방 정책은 이들 러시아계의 목소리가 전혀 배제된 상태에서의 국정 운영이었으며 이들은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의도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다며 공공연히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다가 2014년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친러 정권이 유로마이단으로 축출되자 이에 대한 불만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은 러시아로의 귀속을 원한다며 크레믈린에 귀속을 요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공문서를 비롯한 모든 문서가 이제껏 사용해온 공용어인 러시아어로의 표기를 버리고 우크라이나어만의 표기로 전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친러 계열 민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동부 지역인 도네츠크, 루한스크에 친러계열 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내전은 심화되었다. 러시아 내에서도 자국민을 구하기 위한 군사 행위를 촉구하게 되자 마침내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공격해 합병하게 된다. 그러자 다시 징병제가 부활되었고 이는 우크라이나 군 내부에서도 대대적인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말 그대로 모병제였다가 다시 징병제가 되니 군인들의 사기도 떨어지는데다 그로 인해 군 내에서도 소요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을 아무리 모아봤자 20만 남짓이지만 죄다 오합지졸에 당장 나가서 러시아 군과 싸울 수 있는 군대는 10만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전력 전반에서 러시아에게 절대적인 열세를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보유한 군용기는 수송기를 포함해 200여 대에 불과하다.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2013년 러시아와 군축협의에 합의하면서 겨우 남은 수준이 저 정도인 것이다. 육군 또한 별다른 미사일 방어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와 같은 상태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100전 100패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당시의 약속을 근거로 나토군 파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당장 군대를 파견할 계획은 없다 밝혔다. 그러면서 무기와 탄약 등 우크라이나 군을 지원하기 위한 6,000만 달러(약 704억원) 규모의 군수물자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러한 물자를 아무리 보내봤자 쓸모가 없다.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것은 군사적 개입이지 이와 같은 지원 품목을 바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우크라이나에 미군이 다시 투입될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다른 서방 국가들도 러시아의 에너지 제재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라 군 투입 역시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전례 없는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하지만 2015년 제재보다 더 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러모로 우크라이나는 가장 불리한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시사점은 무엇일까? 외세에 의존도를 높이는 국방력보다 우리도 혹시 모를 대비를 위해 우리 자체의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전례없는 국민분열은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친러와 반러대립이 우크라이나를 최악의 위기로 몰고 있다면 우리는 좌우대립, 남녀대립, 지역대립, 세대대립 등등 각종 이분법식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나마 우리가 우크라이나보다 나은 것이 우리 스스로의 국방력을 갖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미 공조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흑해 위기"를 보면서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 그리고 현대사의 뼈 아픈 교훈을 새기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