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0(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내가 5년 전에 연구 차 스페인을 일주했을 때, 안달루시아의 세비야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 라 수소나(La Susona) 알 카사르 성벽을 따라 산타크루즈 광장 인근에 가면 특이한 곳이 존재하고 있다. 산타크루즈 토레 데 라 플라차(Torre de la Plata) 일대에 카리다드 병원(Hospital de la Caridad)이 있는데 여기는 카사노바의 대명사로 알려진 돈 후안의 모델, 미구엘 마냐라가 실제로 자신의 삶에 후회하며 남은 일생 봉사로 마무리하고자 지은 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후(後) 옴미아드 이슬람 왕조 시대 시내 성벽과 연결되는 교회도 이곳에 존재한다.


Giacomo_Casanova_by_Francesco_Narici.jpg
사진 : Giacomo Casanova by Francesco Narici, 출처 : Wikipedia Giacomo Casanova

 

사진의 집은 자코모 카사노바(Giacomo Casanova, 1725~1798)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집이다. 그는 스페인계 이탈리아인으로 직업이 딱히 없었지만 성직자, 모험가, 시인, 소설가를 자칭했던 인물이었다. 1725년 4월 2일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희극배우 자에타노 주세페 카사노바와 성악가 자네타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의 면면을 보면 꽤 괜찮은 집안이었는데, 그의 어머니 자네타는 유럽에서 꽤나 이름 있는 성악가였다. 

 

그의 동생 중 한 명인 프란체스코 카사노바는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로 성공하게 된다. 아버지 주세페 카사노바는 6남매를 남기고 36살의 나이로 요절해 할머니 손에 키워지다가 할머니도 세상을 뜨면서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에게 맡겨지게 된다. 그의 할머니가 이곳 세비야 출신으로 바로 위 사진의 집에서 할머니의 손에 키워지며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1740년 2월 성직에 입문하여 베네치아의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았다. 동시에 파도바 대학에 다녔고 카사노바는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 들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18살 때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스페인어, 영어 등 5개 국어 이상을 구사했고, 문학, 자연과학, 예술에도 밝았다. 학교에서는 "더 가르칠 게 없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고전문학,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고 춤, 펜싱, 승마 등 교양과 카드 게임 등의 사교술을 익혔는데, 이 때 배운 것들은 훗날 소위 '엘리트들'과의 교류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카사노바는 "광대" 였던 부모님 밑에서 성공하는 방법은 오직 능력뿐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신분 상승의 유일한 방법은 "교회 사제"나 "군인"이 되는 거였고 카사노바는 사제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사제 입문 1년 만에 신학강의를 할 정도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바람둥이의 대명사, 카사노바의 명성을 드러내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성당을 다니던 두 자매의 외모에 반하게 되었는데 카사노바는 두 자매를 동시에 사랑했다. 

 

이 때가 카사노바의 나이는 17세였은데 그 때부터 쾌락에 눈을 뜨게 된 그는 사제로써 성(聖)스러움 대신 성(性)을 선택하게 된다. 그를 둘러싼 섹스스캔들 등의 구설수들이 나오자 교회에서 그를 추방했다. 높은 지식과 화려한 언변으로 인해 카사노바는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다가 1775년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 죄명은 "문란한 사생활"이었다. 그로써 유죄판결을 받은 카사노바는 악명 높은 "피온비"감옥에 갇히게 된다. 피온비 감옥은 수감자를 납판으로 눌러놓아 고문하던 곳으로 악명이 대단했다. 그러나 1년 반 만에 탈옥에 성공하게 된다. 그 이후 카사노바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으며 "전설의 탈옥범" 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며 카사노바는 탈옥하며 유명한 메모를 남겼다 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 나도 자유를 찾아 떠나면서 당신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겠소." 


이후 카사노바는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로 떠난 뒤에는 루이 15세를 만나게 되고 루이 15세는 카사노바에게 "왕실 재정난 해소"라는 중책을 맡기게 된다. 카사노바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복권사업을 추진했고 결국 200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프랑스 왕실에 벌어다 줬다. 그리고 그의 바람둥이 행각이 20세의 나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유학갔다가 2년 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화려한 언변과 재능으로 여자들을 유혹했는데, 이때 베네치아 귀족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더 거칠 것이 없이 심해졌다. 명문 귀족 가문의 간판과 돈으로 카사노바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여자들을 작업했다. 그는 미녀만 밝히는 호색한은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한 여성들도 많이 만났다고 한다. 

 

카사노바 회고록에 의하면 122명의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카사노바는 바람둥이, 난봉꾼의 대명사로 유명해진 것이다. 카사노바가 죽을 때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는 미치도록 여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언제나 여자보다 자유를 더 사랑했다"라고 하면서 죽으면서도 마지막 말로 여자를 언급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인생에서 여성과의 관계 삶의 일부이자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카사노바는 늘 열등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나도 상류사회에서 카사노바는 늘 아웃사이더였다. 카사노바의 인생은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기였고, 여성을 많이 만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카사노바는 모차르트와 각별한 친구 사이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가사도 카사노바가 고쳐주었고 현재 체코 프라하에 있는 모차르트 박물관에는 카사노바의 그림이 지금도 걸려 있을 정도다. 카사노바는 뛰어난 작가이기도 했다. 최초의 공상과학 소설 "20일 이야기" 도 카사노바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말고도 40권이 넘는 책을 썼다고 전해진다.


"해저 2만리"의 쥘 베른 등도 카사노바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카사노바는 생애 3분의 2를 유럽 전역을 유랑하며 보냈다. 러시아에서는 여왕의 초상화를 그려줬고, 폴란드 왕과는 정치 문제를 논했으며, 프랑스에선 철학자 볼테르와 논쟁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뛰어난 천재였는데 그저 "바람둥이"로만 기억한다면 카사노바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사회적 저평가로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진정한 자유주의자, My Way 자코모 카사노바(Giacomo Casanova, 1725~1798)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