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투르크 5차 전쟁(1710-1711)에서 러시아의 패전 및 프루트 조약으로 인한 몰다비아 상실
표트르 대제와 칼 12세의 전투에서 칼의 전술적 패배
이번에는 그 전장이 몰다비아와 아조프, 흑해 일대가 주 무대로 전쟁의 대부분은 표트르 대제와 칼 12세의 대북방전쟁 중 하나로 편입되곤 한다. 폴타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스웨덴 왕 칼 12세가 오스만투르크에 망명하여 러시아를 공격할 것을 종용함으로 인해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 러시아-투르크의 5차 전쟁이다. 이 전쟁은 몰다비아의 프루트 강 일대에서 주로 전투가 벌어졌다.
표트르 1세가 친정했으나 1711년 프루트 강 전투에서 러시아 군은 오스만투르크 군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러시아는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차르인 표트르 대제마저 죽거나 사로잡힐 뻔한 큰 패배였다. 그래서 이 전쟁은 오스만투르크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 승리가 향후 치뤄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의 투르크의 마지막 승리였다. 전후 처리를 위해 체결된 프루트 조약의 결과로 인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아조프의 영유권을 회복했으며 몰다비아 일대의 러시아 요새들을 점거하게 된다.

그러나 오스만 군은 이러한 영토 획득에서 만족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대북방전쟁 전체의 전황은 계속 러시아가 유리했고 결국 러시아는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 제국을 해체하고 발트 해 진출에 성공했다. 대북방전쟁은 1700년에서 1721년까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스웨덴 왕국이 발트 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표트르 대제의 휘하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발트 해 진출을 숙원으로 삼아 당시 발트 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스웨덴을 지목하여 덴마크, 작센과 더불어 반(反) 스웨덴 동맹인 소위 북방 동맹에 가입하게 된다. 이 전쟁은 동맹군이 스웨덴을 선제공격함으로 인해 1700년부터 시작하였으며,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여러 정치 외교적인 상황으로 인해 여러 정치 세력들이 참가하거나 탈퇴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작센 동군연합, 덴마크, 영국-하노버 선제후국 동군연합, 프로이센 왕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우크라이나 자포로제 코사크,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이 참가하는 등 동맹도 자국의 이익에 맞게 변하게 되었다. 이어 전쟁은 뉘스타드 조약, 스톡홀름 조약으로 1721년에 종결되었다. 이후 스웨덴 제국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 국가에서 황제국임을 선언하여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전쟁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러시아 본토로 침공했다가 혹독한 겨울로 인해 대패한 후, 제국마저 붕괴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0년 전쟁 및 수차례의 북방전쟁의 결과 스웨덴은 발트 해 연안의 리보니아, 포어포메른, 브레멘 등을 비롯한 북독일 지역을 상당 부분 장악하여 북유럽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대공위 시기인 혼란 시대에 개입하여 러시아의 유일한 발트 해로의 출구인 잉그리아(Ingria) 지역도 장악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어떻게든 이 지역을 탈환하여 발트 해로서의 진출을 모색하였지만 대홍수 당시 칼 10세 구스타프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덴마크로 공격 방향을 돌렸을 때 알렉세이 1세가 리보니아 침공을 감행했으나 스웨덴 지방 방위군을 상대로도 승리하지 못한 채 패배만 당했던 전력이 있었다. 알렉세이 1세 사후 두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젊은 개혁군주인 표트르 대제는 서구화에 갖은 노력을 가하면서 군사력을 신장시켰다. 한편 스웨덴에서도 검술에 능하고 무인으로 탁월했던 군주인 칼 12세가 칼 11세의 뒤를 이어 1697년 약관 1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신체적인 조건만 어렸을 뿐 그의 신체 자체는 성인 못지않게 강건했으며 강한 군사력을 정비하고 있었다.
이는 시기적절하게 서유럽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동유럽과 북유럽으로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고 중요한 전쟁이던 이 전쟁은 그들만의 전쟁이 되어 아무도 개입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칼 12세는 대북방전쟁에서 선전했지만 폴타바 전투에서 표트르 대제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후, 오스만투르크로 망명해버렸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머물고 있던 칼 12세는 망명 초창기에는 환영받았으나 이후 체류 비용 문제와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예니체리의 공격을 받아 사실상 유폐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그는 예상 외로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빠르게 휴전하자, 계속 술탄에게 러시아 좀 더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에 대해 좋지 않게 여긴 술탄은 결국 그의 요청을 무시해버렸다.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 황실에 친(親) 스웨덴 세력을 심으려고 획책하다가 발각되었고 게다가 자신과 부하들의 주둔 비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 재정에 부담을 주면서 점점 칼 12세는 술탄에 의해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계속 오스만투르크에 의탁하면서 한편 칼 12세의 측근이 막대한 빚을 지게 되자 상인들과 연계되어 있던 예니체리가 이들의 숙소를 공격했고 소규모의 충돌이 있었지만 대체로 예니체리에 밀려 갇혀 지냈다. 결국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스웨덴의 협상 끝에 풀려나와 급히 육로로 스웨덴으로 복귀하였으나 그가 갇혀 있던 시기에 이미 전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어 1710년 표트르 대제는 에스토니아 레발(Reval)과 핀란드 카리알라 비푸리(Viipuri)를 점령하였다.
1714년 표트르 대제의 신생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해군 발트함대는 스웨덴 해군의 소규모 분견대를 공격하려 시도하였고, 이로 인해 핀란드의 항코 반도에서 최초로 러시아 해군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러시아 군은 1713년에서 1714년 핀란드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714년 오스트로보트니아(Ostrobothnia)의 이소퀴뢰(Isokyrö)에서 벌어진 나푸에 전투에서 최종적인 격돌이 이루어졌다. 1714년에서 1721년까지의 핀란드를 정복했던 기간은 스웨덴에 대한 거대한 분노로 알려져 있다. 이 전쟁 중에 발생했던 수많은 격전 기간 동안 많은 핀란드 인이 살해당하거나 러시아로 끌려갔다. 1715년경에는 이미 포메른, 슈테틴을 비롯한 북독일 지역의 스웨덴 영토도 모조리 다 함락되었고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 발트해 연안 영토 역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로 넘어갔다.
그나마 이렇게 버틴 것도 호른 백작을 비롯한 유능한 스웨덴 장관들이 러시아를 상대로 분투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스웨덴을 떠난 지 14년 만에 복귀한 칼 12세는 1716년 덴마크 영토였던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로 병력을 모아 공격을 가했으나 이미 철저히 대비한 방어군의 수비에 밀려 제대로 공격도 못해보고 철수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반격을 가해 오늘날 노르웨이 할덴 주인 프레드릭스텐(Fredricksden)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1718년 포위 상황을 순시하던 중 칼 12세는 유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서 그 생애를 마무리 짓고 말았다. 국왕이 전사하자 스웨덴 군은 전면 철수 했다. 이 때 눈보라로 인해 스웨덴 군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사가에서는 카롤리너(Karoliner) 죽음의 행군이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