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위대한 이유는 태조 왕건 때부터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고 황제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과인"이 아니라 "짐"이라 호칭했으며 중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인 천수(天授)를 사용했다. 이후, 요나라든, 금나라든, 송나라든, 외교적인 입장에서 그들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맞춰주고 경제적이든, 명예적이든 실리를 두둑히 챙겨 나라를 부강하게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는 필수적이다. 광종 때, 30만의 대군을 양성해 이를 광군(光軍)이라 했고 예비군까지 포함했을 때 당시 고려의 군사력은 40만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같은 군사력이니 북방의 강대국인 거란족의 요나라가 고려를 침략했을 때도 대등한 군사력으로 싸워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을 이루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즉, 실리외교 또한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강한 군대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긴 하다. 한국은 세계에서 군사력 5위의 순위를 보았던 바 있는데 그 정도의 군사력이면 충분히 실리외교가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으로 보면 과거 고려가 했던 훌륭한 외교력이 아쉬운 상황이다.

고려가 조선보다 위대한 이유는 거대한 중원 통일 왕조들에게 굽히지 않는 외교력이 역대 한국의 왕조들에 있어 가장 훌륭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꺾이지 않는 군사력으로 만주로의 팽창정책을 추친해 나갔다면 고려의 장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외교력이다. 물론 이 또한 몽골의 침공이 있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고려와 송나라는 북송과 남송 시대 모두 겉으로는 사이가 좋았고 요나라는 고요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나름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금나라와도 마찬가지였다. 960년 송나라 건국시기에 고려 광종이 건국 축하 사절을 보내면서 통교를 시작했다. 만주에 거란이 등장하고 고요전쟁이 발발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하면서 필요에 따라 국교의 단절과 연결을 반복하게 되지만, 그래도 이 과정에서 고려는 송나라를 이용해 요나라를 견제하는 동시에 공무역을 통해 송나라에게서 많은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었고, 송나라 역시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의천대사가 송나라로 건너갔을 때, 송나라 조정에서는 고려사라는 절도 지어주고, 급기야는 고려의 사신을 위구르와 청해성에 걸친 강대국인 서하(西夏)의 사신보다 높이고, 조공사가 아닌 국신사(高麗國信使)란 별도의 명칭을 붙여 격을 높여 주었다. 송나라의 입장으로 볼 때 독자적으로는 요나라와 금나라를 상대할 수 있는 국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려와 동맹을 맺고 요나라와 금나라를 방어하려는 의도가 있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긴 했다.
이러한 송나라의 외교적 방침을 요나라가 있었던 때는 연려제요(聯麗制遼)라 했고 금나라가 있었던 때는 연려제금(聯麗制金)이라 했다. 물론 고려는 송나라 원하는 군사적인 대응에는 매우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물론 송나라도 고려가 고요전쟁 당시 세 차례나 도움을 요청했지만 요나라를 매우 두려워한 송나라는 고려를 요청을 외면했고 고려 또한 송나라의 구원 요청을 거의 외면하다시피 하면서 북쪽의 요나라나 금나라와 통교하여 비교적 잘 지냈다. 물론 고려가 요나라와 금나라의 상황을 알려주고 정보를 공유했지만 실질적인 군사적 도움은 없었다.
외교가 그런 것이다. 고려는 북방이든 중원이든 두루 잘 지내는 것이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경제적인 이득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나 송나라, 모두 서로에게 원한 것은 유목 제국에 대한 견제였기 때문에 견제 그 자체만으로도 외교상의 실리가 있었다. 서로 군사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했어도 유목 제국의 입장에서 상호 후방이 위태로우면 전쟁을 오래 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에서 나오는 효과가 탁월했기에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는 송나라와 고려 어느 쪽도 멸망시킬 수 없었다. 금나라 또한 북송을 멸했지만 중원을 통일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부분만으로도 송나라와 고려는 상호 연합할 가치는 충분했다. 다만 고려의 경우는 고요전쟁 당시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물론 요나라 또한 심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양국 모두 당시 피해는 회복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고려는 예성강 하구를 열어 벽란도에서 이슬람 상인과 교역했고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교역했으며 여진족과의 조공무역으로 인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송나라와도 교역을 했지만 송나라는 대고려와의 무역에서 적자를 면치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고려 사신에 대해서도 융숭한 대접을 해주고 조공무역까지 했으니 송나라의 재정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고려는 상호 간의 그런 약점을 적절히 이용하여 국익을 취했다. 그에 대한 일례로 송나라의 상인들이 고려 사신들에게 물품들을 약탈당했는데 이를 돌려달라고 호소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요나라가 서서히 쇠퇴하면서 실제적인 위협이 줄어들자 송나라의 신료들 사이에서는 고려에 대한 반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 반감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동파(蘇東坡)로 알려진 소식(蘇軾, 1036~1101)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를 대놓고 맥적(貊狄)이라 부르며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고려와의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로,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재정이 파탄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백성들의 새액을 증대해야하니 백성들의 고충이 말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셋째로는 고려가 송나라에서 가져간 물품들을 요나라에게 되팔아 이득을 취하고 있으며 넷째로 고려는 말로만 송나라를 받든다고 하면서 정작 실리만 챙기고 송나라의 지형까지 그려 가며 내실을 조사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째로는 요나라가 고려와의 관계를 두고 이를 문제 삼을 수 있어 중대한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중관계에 있어 최초로 나타난 반한 감정(反韓感情)을 가진 혐한(嫌韓) 인사였다.
그러나 고려에서 소동파의 인기는 대단했다. 고려의 사신들은 소동파의 글을 얻고자 줄을 섰을 정도였고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 1075~1151)과 그의 동생 김부철(金富轍, 1079~1136)은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형제에게서 이름을 따 지었을 정도였다. 당시 고려 사신에게 접대한 비용이 10만 관이 넘었다고 하며 당시 송나라가 평화를 위해 서하(西夏)에게 내주던 공물의 2배의 양이었고, 요나라에 바치던 조공무역값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당시 고려 사신들은 송나라에 입국하면 관리의 위, 아래를 가리지 않은 심한 갑질을 해댔다.
중국 입장에서 이게 얼마나 뿌리박혔던지, 1999년에 제작한 대만 드라마 "소년 포청천"에서 고려 태자가 송나라에서 심한 갑질을 하다가 살해되자 송나라 황제가 고려가 침공해 올까봐 두려워하는 내용이 있었을 정도였다. 고려의 사신이 들어오면 송나라 조정이 백성까지 동원해 운하까지 파려고 했는데 이 때 손부(孫傅)라는 신하가 반대하자 이를 파직시켰다. 이에 손부의 파직이 부당하다고 허한(許翰)이라는 또다른 신하가 이의제기를 하자 허한마저 파직시켜 버렸다.
고려 사신이 지금의 산동성인 청주를 방문하자 청주의 관원들이 성 밖에 나와 고려 사신에게 절을 올렸으나 오직 청주의 종사 호순지(胡順之)만이 절을 하지 않아 송나라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일화도 있었을 정도다. 이처럼 고려에게 송나라가 고려에 과하게 퍼준 이유는 앞서 언급한 요나라와 금나라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려면 송나라는 고려에게 최대한 잘 보여야 했던 것이다. 고려는 송나라의 이런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최대한 송나라를 이용해 뜯어 먹었다.
숙종 시기 여진이 준동할 때까지 고려는 송나라를 철저히 뜯어 먹으며 1020년부터 1103년까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평화로운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이 83년의 새월을 동북아시아의 "팍스 코리아나"로 부른다. 고려는 "팍스 코리아나"의 부유함과 강력함을 과시했던 국가였고 실리외교를 통해 중국과 아주 대등하게 맞섰던 시기였다. 비록 그 세월이 83년에 불과했지만 이 기간 내에 역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기라고 본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옛 조상들인 고려의 사례도 있듯이 이런 훌륭한 외교가 아쉽다.
이후 중국은 명나라 시기에도 북방의 위협인 오이라트와 타타르에게 막대한 세액을 퍼주었다. 이들이 침략해 올까봐 막대한 재정의 타격을 입으면서도 이들을 달랬던 것이다. 그러나 반면 조선은 고려만큼 외교에서 지혜롭지 못했다. 그 시기 고려가 송나라에 했던 것처럼 명나라에 철저히 뜯어 먹으며 실리를 취할 수 있었는데 조선은 명나라를 사대의 예로 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무능한 외교는 조선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