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0(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아프리카 중부 지방에서 가장 영토 면적이 큰 나라인 콩고민주공화국 (옛 국명 자이르)에서는 1996년부터 현재까지 약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내전이 지속되고 있다. 유엔 공식적으로 제1차 콩고 전쟁(1996~1997)과 제2차 콩고 전쟁(1998~2003), 제3차 콩고 전쟁 (2012~ 키부분쟁 포함 현재)으로 분류되어지고 있는데 세계 1위의 다이아몬드 생산량, 구리, 코발트, 탄탈럼과 나이오븀의 혼합물인 콜탄(Coltan), 우라늄,  금, 주석, 망간, 납, 아연 등 엄청난 자원이 있으며, 해상 유전까지 개발되고 있는 아프리카 최대의 자원 부국(富國)이다. 이러한 국가가 30년 가까이 내전이 지속되어 파괴되고 있는지, 대표적인 "자원의 저주" 국가라 볼 수 있다. 


First_Congo_War_offensive_map_en.svg.png
사진 : 제1차 콩고 전쟁 당시의 현 콩고민주공화국, 출처 : First Congo War - Wikipedia

 

벨기에령 콩고에서 20세기에 일어난 독립운동을 통해 콩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독립한 이후 콩고 공화국은 정치적 혼란에 빠졌는데, 1965년 자이르에서 정치적 혼란을 잠재우고 권력을 장악한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1930~1997)의 정권이 1996년까지 30년 동안 이어왔다. 모부투 세세 세코는 나라 이름을 콩고에서 자이르로 바꾸면서 전형적인 아프리카의 독재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천연 자원과 국고를 착복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지만 오히려 서방 세계로부터 공산주의에 맞서는 보루로 온갖 지원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면서 서방과의 관계도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더불어 1960년에 비해 90년대 중반까지 GDP가 65%나 감소하자 모부투는 과도 내각을 구성하여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이어 1994년에 콩고 동쪽의 르완다에서 르완다 내전이 발생하자 수많은 후투족 난민들이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피난을 오게 된다.  


제1차 콩고 전쟁을 보려면 르완다 내전을 보아야 이해할 수 있기에 르완다 내전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자 한다. 원래 르완다에서 소수 민족에 불과했던 투치족은 절대다수 종족인 후투족보다 상류 계층에 있었지만 1960년대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왕정이 붕괴되고 후투족 정권이 들어서 있었던 상태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투치족을 비롯한 많은 소수민족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후투족 기득권층은 후투 파워(Hutu Power)라는 조직을 결성해 투치족을 척결해야 한다고 프로파간다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후투 파워는 투치족이 후투족을 노예로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기에 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사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르완다는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같은 시기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서도 사정이 괜찮은 국가였다. 그러나 르완다의 경제 성장은 커피와 같이 일부 한정 작물의 수출이 활성화 될 때 이루어진 것이라 한계가 명확했다. 


게다가 내부의 부패가 심각하고 오로지 한정 작물의 수출에만 의존하다 보니 1980년대 후반 들어서부터 커피 값이 폭락하게 되자 외화 수입이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간의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그러면서 화전농업의 증가로 민둥산이 늘어나 상황이 악화되면서 경제적인 쇠퇴는 더욱 가속화 된다. 이로 인해 빈민층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후투의 기득권층은 부유했다가 빈민층으로 전락한 후투족들의 불만을 투치족들에게 돌리기 위해 학살에 대한 정당성을 만들었다. 

 

그로 인해 투치족은 민병대를 조직하고 내전을 일으켰다가 권력 분점 합의를 하면서 전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였는다. 르완다 대통령이 부룬디 대통령과 같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내전은 재발하게 된다. 이 엄청난 비극을 불러온 비행기 사고는 누군가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것에서 발발하게 된 것인데 권력 분점을 약속으로 내걸은 평화 협정에 반대한 후투족 내 강경파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여겨져 투치족들이 분노하여 후투족을 습격하면서 벌어졌다. 


이 때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했지만 투치족이 재반격해서 승리하면서 수많은 후투족들이 피난길에 올랐고 자이르에 들어와 흩어지게 된다. 이 같은 르완다 내전의 본질은 집단 서방으로 불리는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고의적으로 조장된 것이었다. 원래는 투치족과 후투족이라는 구분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과 벨기에가 르완다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분할하여 통치하는 방식으로 투치족과 후투족을 구분하다 보니 발생한 일이다. 

 

이 르완다 내전에 콩고와 자이르까지 말려 들어가게 되었는데 후투족 난민들 중 르완다에서 르완다 학살이라는 최악의 제노사이드를 저지르고 도주한 무장 집단인 인테라 함웨(Intera Hamwe)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이 당시 자이르(현 콩고)를 거점으로 반군을 조직했다. 이들의 거점은 주로 후투족 난민촌이 중심이었고 이 난민촌을 통해 무기와 물자들이 인테라 함웨 반군 집단에 공급되었다. 이들 인테라 함웨는 르완다의 국경을 넘어 공격에 가세했다. 


따라서 르완다군은 자이르 내의 후투족 반군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로는 위협이 될 소지가 높은 자이르의 동부 지역을 불안정화하여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자이르 내의 투치족에게 무기를 공급했다. 자이르의 모부투 대통령은 이 같은 행위를 맹비난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당시 유엔평화유지군 2,500명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반군과 정부군의 평화 협정 이행 감시를 위해 주둔한 평화유지군은 종족간의 잔인한 살육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특히 '세계의 인권 경찰'을 자처해온 미국은 개입을 극력 회피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이르의 모부투 대통령이 르완다 내전과 그 여파로 인해 자이르 국경에서의 위협을 저지할 힘이 있을리 만무했던 것이다. 결국 자이르는 112만 명에 달하는 후투족 난민들이 수용된 캠프를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후투족에게 압박을 가했다. 이러한 결정 자체가 자이르의 모부투 대통령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이르 내의 투치족 무장세력이 난민들을 공격해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또 다시 후투족 난민들은 필사적으로 자이르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자이르 군은 후투족 난민들 중 옛 정부군 및 민병대 출신들과 연합하여 자이르 내 투치족인 바냐물렝게(Banyamulenge) 족을 탄압했다. 자이르에 의해 탄압 당한 바냐물렝게 족은 반군을 조직하여 한 때 모부투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로랑 데지레 카빌라(Laurent-Désiré Kabila, 1939~2001)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반군의 이름은 콩고-자이르 민주 해방 연합군(ADFL)이라 붙여진다. 

 

카빌라는 자이르 동부 지역에서 모부투 독재에 저항하는 게릴라 운동을 계속 일으켰던 저항 지도자였다. 게다가 그는 아프리카 내의 "티토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제3 세계 공산주의자였고 더구나 베오그라드 대학을 졸업했던, 유고슬라비아 및 세르비아와 관련이 깊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르완다 내전의 영향으로 르완다와 우간다의 지원을 얻은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카빌라는 르완다 애국군(Rwandan Patriotic Army, RPA)과 우간다의 지원을 받아 자이르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유고슬라비아의 지원을 받았던 카빌라에 비해 친서방파인 모부투는 서방 세계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서방은 모부투의 요청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따라서 자이르 정부군은 ADFL군보다 숫자는 많았지만 거의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기에 카빌라와 ADFL은 파죽지세로 수도인 킨샤샤로 진군해갔다. 서방의 지원을 받는데 실패한 모부투는 외부에서 용병을 데려오려 시도했다. 

 

처음에는 PMC인 EO(Executive Outcomes)와 접촉했으나 비용 문제로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고 대신 프랑스로부터 한 업체를 소개 받게 되는데 이들이 세르비아 용병대로 알려진 '화이트 리전'이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 군사정보국(DRM) 소속의 유고슬라브 페트루시치(Југословен Петрушић)가 이권을 노리고 진행시킨 계약이었다. 페트루시치는 세르비아와 프랑스 시민권을 가진 이중 국적자였으며 보스니아 내전에 관여해 스파이로 활약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후 코소보 사태와 걸프전쟁에도 개입한 친서방파 유고인이었다.


모부투의 승인을 받고 자이르에 도착한 화이트 리전 구성원들은 대부분 스르브스카 공화국 민병대 출신들이었고 이들은 스레브레니차에서 포로들을 학살한 이력이 있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집단 서방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군과 싸운  실전 경험이 있었던 자들이었다. 모부투는 처음에 이들이 엉망이 된 자이르 정부군을 대신할 충분한 전력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였기에 기강이 잡히지 않은 오합지졸에 갖은 전쟁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 최악의 전범군대였다. 

 

이들 화이트 리전들은 술에 취해 민간인들을 살해하거나 간첩으로 의심해 고문하고 살해했다. 그리고 민간인들 여성들을 집단 강간하고 잔인하게 때려 죽이는 등, 오히려 문제만 일으켰다. 이들은 자이르 정부군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부군이 졸전을 거듭하며 전황이 점점 더 악화되자 화이트 리전들은 결국 임무를 포기하고 거점이었던 자이르 동부 도시 키상가니(Kisangani)를 탈출해 스르브스카로 돌아갔고 결국 카빌라는 수도 킨샤사를 점령해 내전에서 승리했다.


모부투는 수도 킨샤샤가 함락되기 전에 스위스로 탈출했다가 모로코로 망명했다. 이후 1997년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는데 사망할 무렵에는 187cm의 장신이었던 모부투의 체중이 40kg 밖에 안 되었을 정도로 야위였다고 한다. 한편 모부투를 몰아낸 카빌라는 모부투가 자이르로 바꾼 국명을 다시 본래의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모부투가 킨샤사라고 바꾼 수도 이름은 '레오폴드빌'이라는 원래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다. 카빌라는 반서방주의자였으며 사회주의자였기에 레오폴드빌의 어원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였다는 점에서 바꾸기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부투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카빌라 역시 독재자로 군림하여 반대 세력들을 탄압했고 이는 불과 1년 후, 제2차 콩고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아프리카 중부의 대국(大國) 콩고민주공화국에서의 어두운 그림자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