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이바노브나가 러시아의 왕위에 오를 당시 그녀의 공식적인 대외정책 역시 수비였다. 이 당시 러시아는 세계무대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신흥국이었다. 대륙이라는 지리적인 위치에 힘입어 동서 대륙 연결를 통한 무역이 늘고 있었으며 로마노프 왕실은 17세기 말에 비투스 베링 등을 고용해 알래스카를 탐험하는 등 대외식민지 건설을 위한 첫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러시아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18세기의 저서인 <러시아의 정책을 위한 소책자(Клевета России Полицейе)>나 미하일 셰르바토프(М. М. Щербатов, 1733-1790)의 저서에서 보이듯이 대륙 방어 전력 위주의 방어 전략을 주문하고 있었다. 해상 무역은 장려하되 육군은 우랄 지역이나 시베리아 일대에서 발생하는 소요를 막기 위한 정도면 충분하며 유라시아 대륙의 분쟁에는 가급적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중상주의와 군사적 고립주의 정책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이제 표트르 대제로 인해 막 바다에 관심을 갖고 해상 무역으로도 부를 축적하고자 했던 러시아 정부에 있어서 새로이 발견된 크림 및 아조프 지역과 함께 흑해의 교역망까지 장악한 오스만투르크의 독점은 단순한 껄끄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경우에서 따라서 국가 경제를 묶어둘 수 있는 위험 요인이었다. 아울러 당시 러시아가 해외 무역에 매달린 이유는 전체적으로 토지는 넓은데 경작할 땅과 추운 날씨로 인해 인구가 적어 농업 생산력 자체가 높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조세체계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해 세금과 국가예산 확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합스부르크나 오스만투르크와 같이 정기(定期)적인 조세제도가 확립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국가의 무력을 유지하는데 대한 애로가 컸던 것이다. 러시아가 완벽한 정교회로 확립되면서 기존의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재산을 탈취하여 확보한 왕실의 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러시아의 해상력을 유지하는데 태부족이었고 항만을 통한 관세 등의 수입이 예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러시아의 사략함대(私掠艦隊, Privateer fleets)였다. 표트르 대제 때부터 그 위명을 드높이게 되는 러시아 해군(Royal Navy)은 아직까지 존재가 미미했다. 세입이 확실치 않은 러시아 왕실이 정부 예산으로 거대한 해군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나 이바노브나 여왕이 즉위 초기에 무장 함선을 소유한 자들에게 나포 면허장을 내주어 외국 함선을 공격해 물품을 나누어 가지게 한 것은 어떤 거대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입이 빈곤한 국가가 나름대로 해상전력을 유지하려는 방책이었을 뿐이었다.
아울러 유럽 전역에 영역을 가지고 있는 합스부르크나 신성로마제국이 대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유럽 전 대륙을 프로테스탄트화 시킨다면 정교를 표방하고 있는 러시아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톨릭과 정교 사이를 왕래하고 있는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우호적인 세력을 확보해야 하였다.
이는 1731년에 러시아의 해상 교두보라고 할 수 있는 나르바가 폴란드의 손에 함락되면서 더욱 다급한 문제가 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춥고 얼어붙지 않는 다른 교두보를 확보하고 부동항을 찾는 동시에 대륙의 정교 세력을 지원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732년에 오늘날 몰다비아 지방의 오데사에 상륙하여 점령하였으나 1733년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교 세력인 벨라루스 군단들이 오히려 카톨릭 세력과 손을 잡고 러시아 군을 오데사에 몰아내면서 어렵게 얻은 교두보는 상실되었다.
종교도 종교이지만 사실 러시아가 흑해와 지중해에 나포 면허장을 발부하면서 사략선주들을 고용한 이유는 오스만투르크에 의한 흑해 및 지중해 무역의 독점을 막고 러시아 무역선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사략선의 성격 자체가 개인투자가들이 배와 선원들을 사서 바다로 내보낸 후 나포한 함선과 그 내용물에서 이익을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에 직접적인 재정적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 차원에서 사략행위를 허가해준 주된 이유는 해상무역의 위험요인을 높여 경쟁국들의 무역비용을 높이고 이들을 바다에서 몰아낸 다음 그 자리를 러시아가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 사략선들의 주요 목표는 크림 반도와 지중해 일대를 오가며 장사하는 이탈리아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무역선, 그리고 오리엔트 일대에서 취득한 보물들을 코스탄티니예로 실어 나르던 보물 수송선단(Treasure fleets)이었다.
3개 대륙을 경영하는 초기에 막대한 양의 황금과 보물이 코스탄티니예로 옮겨지면서 오스만투르크는 경제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지만 그 운반 작업이 체계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 때문에 황금과 보물을 실은 배들은 흑해를 횡행하던 해적들의 주요 목표물이 되었고 경우에 따라 오스만투르크의 경쟁국이 흑해와 에게 해 해안의 오스만투르크의 식민도시들을 습격해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특히 1734년에 오스트리아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이탈리아의 사략선단이 오스만투르크 흑해 식민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림 반도의 심페로폴을 습격해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해결책에 고심하던 오스만투르크 정부는 러시아-투르크 6차 전쟁이 발발하던 1735년에 모든 보물 수송을 군선이 호위하게 하는 호송 체계를 발족시키면서 많은 국가들의 영해 침공이 빈번하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이 발생했다.
특히 조지아 이메레티 왕국의 항의와 몰디비아 공국의 항의가 강했는데 이들의 반발로 아조프의 마리우폴에서 출항한 군선들이 크림 반도 세바스토폴에 모인 수송선들을 만나 선단(convoy)를 이루어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헤르손과 멜리토폴에 상선을 파견하던 러시아와 충돌하게 되었고 오스만투르크의 군함이 러시아 상선을 침몰시키자 이를 구실로 러시아는 오스만투르크에 전쟁을 선포하고 아조프 일대를 공격하게 되었다. 이로써 러시아-투르크 6차 전쟁 (1735~1739)이 시작되었다. 후일 러시아의 사략선은 흑해함대의 원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