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용의 이치와 존재의 모순
계엄을 둘러싼 나라 안의 여론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는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고 해당되는 말이다. 좌(左)는 좌(左)대로 불편하고 우(右)라면 또 우(右)이기에 불편하다. 상식을 소유한 일반인들이라면 정치를 바라보는 이런 불편함 때문에 평소에는 정치를 외면하려고 드는 경향이 커진다.
지켜보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양쪽 진영의 논리가 심한 마음의 불편함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권 여당의 목소리쪽이 더욱 실망스럽다. 주장의 근거가 너무나 터무니없는 데다 듣고 있다 보면 저게 상식을 가진 사람이 들고 나오는 소리인가 싶어진다. 이건 상식을 넘어선 일종의 궤변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나는 그래서 헌재를 둘러싼 좌우(左右) 진영의 주장과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떠올리는 문구가 있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다. 아마 이 하나의 문구가 그처럼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의 목소리에 딱 맞는 개념으로 여겨진다. 그럼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어떤 의미의 주장일까?
매사에 입만 열면 모순에 직면하는 우리 언어활동의 허구성에 관한 문제다. 지금과 같은 특정 상황의 경우를 떠나서도 인간이 지닌 주관과 객관, 무한과 유한, 전체와 부분 등의 문제는 부처님조차 대답을 거부했을 만큼 모순을 피해가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이 모순은 침묵으로 설법을 대신한 설법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존재의 모순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불교적인 관점을 하나 예로 들어보자.
불교의 윤회설은 윤회설 자체의 의미가 이미 비불교적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끊임없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돈다는 윤회설은 불교의 공(空) 사상과 본질적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는 세간의 일체법이 항상함이 없음에도 나라는 법상이 인정되는 공(空)이라면 도대체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달리 말해 나의 전생이 있고 현생이 있고 죽어서 돌아가는 내생이 있다면 그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이런 모순의 문제는 이미 서양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도 제시된 바 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파르메니데스에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르가논에서 그것을 파라독스의 개념으로 정리하여 하나의 주된 논제로 삼았다. 그 가운데 전자는 역설의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고, 후자는 역설을 해결하고자 초점이 맞추어진 내용의 구성이다.
먼저 파라독스라는 역설(모순)의 개념을 중심으로 모순의 문제를 살펴보자.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역설은 반대쪽이라는 뜻의 para와 통념에 해당하는 doxa가 결합한 형태다. 즉 역설의 개념에 해당하는 파라독스는 어떤 말이건 그 말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말속에 반대쪽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기 마련이라서 스스로 자기의 말이 자기 말에 어긋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예로 김상일의 역과 탈현대의 논리를 잠시 인용해보자. “거짓말을 거짓말한다고 하면 거짓말은 거짓말에 대한 말의 말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참말이 되어 서로 말이 어긋나게 된다. 반대로 거짓말에 대해 참말을 하면 거짓말이 된다. 이렇게 말에 대한 말은 서로가 어긋나버린다. 이것이 바로 풀지 못할 난제(難題)다.
이러한 난제는 무한과 전체를 다루는 순간 바늘의 실과 같이 따라다니게 된다. 두 가지 말의 경우 하나는 대상에 대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에 대한 말이다. 후자는 메타언어라고 한다. 즉 대상과 메타의 상충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같으면서 색깔이 다를 수도 있지만 이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 나타나는 불교의 입장과 일치하는 주장이다.
불교에서는 어떤 것이 그 예가 될까. 모든 것은 항상함이 없으며 나라는 법상이 없다는 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제자가 세존에게 내세에 관해 물었다. 자기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의 나는 누구이고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세존은 묵묵히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그 말 자체는 이치에 합당하지 않고 수행자의 정진에 있어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세존 설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사치기라고 말하는데 그 까닭은 묻는 사람의 질문 안에 내재된 명제 상의 모순 때문이다.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와 내생의 나로 구분하여 말하는 그 이야기에는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변화 자체의 개념을 사실은 본질적으로 부정하는 모순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반대로 모든 사물이 변한다고 말할 때도 말의 의미 속에는 말 자체의 항상함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말로서 사물의 궁극적인 이치를 설명하기 어려운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세존은 그 제자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받아넘긴다. 변화와 변하지 않음, 이것은 하나의 짝이다.
이쪽과 저쪽 나와 너 모든 상대적인 개념들은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 짝은 서로 반대쪽의 개념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의미를 성립시킬 수가 있다. 이것은 바로 역(易)이 음(陰)과 양(陽)을 하나의 틀로 하여 도(道)라고 일컫는 주장[一陰一陽謂之道]과 통한다. 주역 계사전의 본문 내용이다.
그럼 이와 같은 모순의 문제는 주역 이해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본질과 현상의 동시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역의 변화 과정을 말할 때 태극(太極)이 음(陰)과 양(陽)이라는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兩儀)가 사상(四象)을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는다고 보아 이것이 다시 밀치고 움직이면서 64괘로 펼쳐진다는 발생론적 시각을 견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변화의 맥락에서 보면 발생론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동시성을 지니는 개념이다. 그 까닭은 발생론의 개념이 우리의 존재론적 사고를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며 존재론은 결국 존재 이면의 부재 곧 태극(太極)의 개념으로 바꾼다면 태극 이전의 무극(無極) 개념을 동시에 포함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질에서 물질이 성립하는 공간의 문제를 두고 보자. 공간이란 하나의 일정한 유형의 존재와 더불어 생겨난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것처럼 유(有)를 감싸고 있는 에테르 같은 물질이 아니다. 역(易)의 이치에서 말하면 양(陽)에 대한 음(陰)의 개념이다.
일 년 절기의 전체 마디를 24절기로 이해할 때 이는 12마디의 형태로 환원되어야 하고 보름이 아닌 한 달 주기를 하나의 단위로 바라볼 때 12마디는 다시 6단락의 형태로 환원되어 하늘의 기운을 육기(六氣)로 되돌리는 이유도 그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6단락은 하나의 음(陰)과 하나의 양(陽)을 그 안에 포함한 12마디의 변화 형식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하는 유(有)라는 개념은 결코 유(有)만의 유(有)가 아니다. 무(無)가 하나의 전체로서 포함된 유(有)다. 태극(太極)도 마찬가지다. 태극은 태극이지만 그래서 무극(無極)이다. 태극이 무극이라는 것은 태극이 음과 양으로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뜻하고 음과 양으로 움직여 태극을 드러내 보인다면 이것은 무극이 아닌 음과 양의 작용으로 나타난 태극이다.
따라서 태극은 음과 양의 작용을 낳지만 음과 양의 작용은 태극을 떠나 있지 않고 태극의 활동 자체는 바로 음과 양이면서 무극 그 자체가 된다. 그러므로 역의 작용은 헤아려지는 대상이 아니다. 거기에 드러나 있는 양(陽)의 이면에는 음(陰)의 성격이 항상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계사전에서는 역이 일정한 체를 지니지 않은 신(神)으로 표현하며 방소(方所)가 없는 역무체(易无體)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국가를 책임진 위정자들로서는 명심해야 하는 게 있다.
정말로 매사가 이 같은 철학성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상식에 맞는 주장들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자신의 주장과 견해가 정당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상대적인 입장에 빠져드는 한계를 인정하고 제발 겸손했으면 좋겠다.
진영의 정당성을 내려놓고 항상 국민 다수를 배려하자면 그 길밖에 없다. 그렇기에 제발 입이 달렸다고 뱉어나오는 대로 무식한 자기 정당성만 떠들어대지 말고 스스로 나라의 지도자들이라고 자부한다면 오래된 서재의 고전 한 줄이라도 눈에 붙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너무 엄청난 주문이긴 하겠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모순의 강을 건너며
바람이 불면 산도 흔들리고
강물은 흐르지만 그 자리에 있다.
태극은 움직이면서도 고요하고
무극은 고요하면서도 이미 움직인다.
좌(左)와 우(右)는 서로를 부정하고
말은 자기 안에 모순을 품는다.
진실을 말해도 거짓이 되고
거짓을 말해도 진실이 된다.
마치 몰상식한 이땅의 어떤
정치인들의 주장처럼 그러므로
그대들 세존의 침묵을 기억하라
전제가 어긋난 채로 묻는 이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그 가르침을
하늘의 해와 달이 함께 도는 이치
하나의 음(陰)과 하나의 양(陽)
끝없이 나뉘지만 하나의 길로 세상은 모이나니
나라의 소란 속에서 우리의
평안은 어디에서 찾겠는가?
말하지 않음 속에 남겨진 뜻이 있듯
산 너머 달빛 되어 비추는 고요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