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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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그래픽이다.(그래픽=저널인뉴스)

 

언어와 사고의 관계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언어는 사고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주장에서부터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에스키모인들은 눈에 대한 다양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내리는 눈은 물론이고 바람에 휩쓸려온 눈, 녹기 시작한 눈, 땅 위에 있는 눈, 단단하게 뭉쳐진 눈 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개념의 구분이 생활의 현장에서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환경이나 문화적인 차이에 따라서 다양한 언어를 만들어 사용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언어는 사고의 표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어를 떠나서는 사고를 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언어과 사고의 관계는 복잡하다.

 

 다만, 언어는 기본적으로는 의사소통의 필수적인 수단이지만, 한편에서는 인간의 사고를 경직시키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지나칠 때는 정신병리를 유발하기도 한다.


정신병리를 유발하는 대표적 예로 이분법적 사고를 들 수 있겠다. 이분법적 사고는 흑백의 논리와 동일하다. 자신의 성취를 성공 아니면 실패로 간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10%의 실패도 전체의 실패로 인식한다. 특히 경계선 성격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의 경우는 타인을 천사 아니면 악마로 인식한다고 한다.

 

 생각이 극단으로 치우치기에 결국 개인은 심한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된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이분법적 사고는 어릴 때 어린아이가 어머니와 갖는 관계에서 형성된다고 한다. 만약 어머니의 정서가 불안하여 어머니가 아이에게 애정과 분노를 번갈아 표출하는 경우 어린아이는 분리라는 방어기제를 발달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의 경우 다양한 행위에 양극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모호한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회색분자로 매도한다고 한다. 세상이 그렇게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을 그렇게 인식한다.


이분법적 인식은 현실을 과도하게 단순화하고 왜곡시키며, 극단적인 감정과 행동을 유발한다. 이러한 사고는 개인이 겪는 심리적 고통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간의 갈등과 반목으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는 이분법적 사고도 결국은 국민을 양분시킨다. 그 원흉은 아무래도 정치권일 가능성이 크다. 

 

민주주의라는 제도 속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표를 얻어야 한다. 국민의 표를 얻기 위해서 그들은 언어를 활용하여 국민들을 기만해야 한다.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변모한다. 요즘은 유튜브를 통한 온갖 거짓 선동은 이 사회를 더욱 혼란케 만든다. 정당한 언론의 기능이 마비된 사회에서 초래되는 비극일 것이다. 

 

한때 계몽의 역할을 담당했던 언론이 이제는 권력과 손을 잡고 이 사회를 야만의 세계로 변모시키고 있다. 언어는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 논리 비약을 포함하여 언어는 그릇된 것을 참된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그릇되게 사용한 예로는 최근 대통령이라는 자가 하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슨 비상계엄이냐?”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비상계엄이 아니라 ‘비상계몽’이라는 말도 스스럼없이 사용한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대통령은 분명히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에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선거관리위원회와 국회에 무장 군인을 투입했다. 만약 그 당시 국민 다수가 국회에 집결하지 않았고, 국회의원들이 국회의 담을 넘어서 국회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비상계엄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그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만약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대통령의 말이 정당했다면, 국회가 비상계엄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지 전에 “단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계엄을 선포했을 뿐이고, 이제는 계엄을 해제한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비상계엄해제 결의안이 통과된 이후에 계엄 해제를 선포했다.

 

 결국 실패한 계엄이었을 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한 정치적 중립을 언급하기도 한다. 대통령이 자신의 뜻에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종북좌파로 내몰고 자신의 뜻에 찬성하는 사람만 우리 편이라고 한다면, 그가 말하는 정치적 중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전형적으로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이다. 저런 사람이 탄핵 인용이 부결되어 다시 대통령직무를 수행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심리적으로 경직된 사고는 개인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고통과 불행으로 몰아간다. 경직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해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불안한 느낌마저 느낀다.. 결국 그들은 이분법적 사고를 더욱 강화시킨다. 흑백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점점 더 그를 고통의 수렁에 빠트릴 뿐이다. 그는 결국 영원한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사고의 유연성만이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온다. 사고의 유연성을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불교가 제시하는 수행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화엄의 세계는 사사무애의 세계이다. 선과 악이 상즉하고 선 속에 악이 있는 상입의 세계, 일즉다이고 다즉일인 세계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비의 마음이 샘솟는 세상이 선의 세계일 것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은 제법무상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사고의 유연성을 길러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는 언어의 그물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언어의 악기능도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언어의 부정적 기능은 권력층에서 국민을 기만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우리가 깨어있어야 함은 그러한 언어의 부정적 기능으로 말미암은 온갖 허위를 깨어부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언어의 부정적 기능을 극복하고, 나아가서 언어의 순기능을 잘 활용하여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바람직한 세상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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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덫, 사고의 자유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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