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부터 본격화된 콩고 내의 내부 분쟁 시작은 콩고 민주 연합(Rally for Congolese Democracy, RCD)의 내부 갈등이었다. RCD의 내부 분열로 인해 일부가 우간다 진영으로 넘어가 새로운 무장단체를 조직했으며 이에 우간다가 르완다와 반군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카빌라의 정부군과 정전 협정을 체결하자, 우간다와 르완다는 서로 협력하던 처음의 모습과는 달리 서서히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르완다와 우간다는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고 그러한 와중에 카빌라는 따로 반군과 맺었던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새로 군대를 모아 반군과 전투를 재개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전쟁은 대규모 콩고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콩고 동부 지역에서 소규모 공방전의 형태로 계속 이어지며 내전으로 확대하게 된다. 사실 이처럼 내전이 촉발하게 된 것은 우간다와 르완다의 입장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우간다의 경우 우선 북부 지역의 LRA(신의 저항군)라는 도적 집단으로 인해 콩고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어려웠다.

더불어 자국의 인구와 국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콩고가 내부적으로 통합되거나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치명적으로 다가온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콩고가 큰 타격을 받아 외부에 공세를 펼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한 것만으로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어 일단 물러서게 된다. 그러나 르완다의 전쟁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에 동부 지역에서 전쟁 자체는 계속되었다. 또한 전쟁 기간 내내 이들 정규군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병대들도 활동하였다.
카빌라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할 목적 및 르완다 및 우간다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용병들을 모집했다. 이들은 주로 소수 부족들이었고 이들로 구성된 부대를 마이마이(Mai-mai)라고 불렀다. 이들은 주로 자신들의 지역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 되었지만 상당수는 전쟁의 상황을 이용해 약탈과 같은 전쟁범죄를 하려는 기회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남아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원래 카빌라는 전쟁을 중간에 종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어차피 우간다와 르완다가 서로 분열된 상황에 있있고 남북아프리카의 군대가 콩고를 지원하고 있었기에 승산은 콩고 쪽에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 지쳐있는 콩고인들의 입장으로 볼 때 카빌라의 확전론에 극렬히 반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대도 전쟁에 반대하는 민심을 외면할 수 없게 되면서 결국 카빌라와 군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이에 카빌라 본인의 아들이지만 온건파로 분류되던 조제프 카빌라(Joseph Kabila)는 아버지의 확전을 반대하게 되면서 카빌라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이들은 카빌라에게 전쟁을 종결할 것을 요구했지만 카빌라는 듣지 않았다. 결국 2001년 카필드 육군참모총장이 카빌라에 반기를 들면서 쿠데타가 발생했고 카빌라는 카필드의 사주를 받은 자의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카필드의 쿠데타 배후에는 카빌라의 아들인 조제프가 있었다는 것이 정설인데 그는 카필드를 이용해 콩고군 조직들을 장악했고 결국 아버지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조제프 카빌라(Joseph Kabila)는 정권을 잡게 되면서 전쟁 참가 세력들의 의견이 급속히 전쟁 종식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으며 2002년 남아공의 선시티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장기적인 전쟁을 종식시키게 된다. 이에 따라 남북 아프리카 각국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남은 반군 세력들도 정부군과 협정을 맺으면서 종전에 합의했다.
종전에 대한 조건에는 조제프 카빌라가 콩고민주공화국을 민주선거와 다당제를 가지는 민주국가로 변경하겠다고 약속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 따라서 반군 세력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군사적으로 대항할 필요 없이 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서 정치적으로 대항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반군과 정부군을 지원하던 국가들 역시 명분을 잃게 되면서 남북 아프리카 국가들의 철수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르완다를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하게 이해관계가 없는 국가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 또한 오랜 전쟁에 대한 피로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반면 폴 카가메는 이와 같은 종전 협정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르완다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던데다 결국 협정이 결렬되면 콩고군과의 직접 마주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르완다의 군대는 붕괴될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폴 카가메는 비공식적으로 개입하는 측면으로 본인의 주장을 선회했다. 1~2차에 걸친 콩고 전쟁은 독재 정권과 반군의 내전, 그리고 각 인종 간의 갈등과 주변국들의 자원에 대한 이해관계 등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발생한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쟁의 추정 사망자만 약 54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처참했으며 이 추정 사망자는 건 실제 전쟁 희생자보다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엄청난다는 얘기다. 아프리카는 평상시에도 이와 같은 형태의 사망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콩고 전쟁은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전쟁이 되었으며 21세기 들어 가장 처참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전쟁 기간 중 수많은 전쟁범죄들이 저질러졌는데 강간, 약탈, 살인 등 온갖 전쟁 범죄들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9살 난 딸 앞에서 어머니를 강간하고 딸까지 강간한 후 살해하거나, 어머니 앞에서 어린 두 아들을 살해하는 등, 한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모두 도륙하는 등의 사례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한편 2006년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40년 만에 민주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였는데 당선자는 조제프 카빌라였다.
그러나 그 역시 최근에는 부정선거로 당선되었다는 이야기가 보도되는 등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경제 상황이 수 년째 아프리카 최빈국에 머물 정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동부 지역은 당국의 통제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여전히 반군들과의 소규모 전투 및 전쟁범죄는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조제프의 통치 능력 또한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콩고 동부 지역은 정예군으로 산재해 있는 반군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한 곳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도시를 반군에게 내주는 등, 군세가 갈수록 약세에 있고 UN의 권위를 내세워 겨우 반군을 시내에서만 물러나게 할 정도로 군사적인 위력 또한 강하지 못하다. 가장 큰 문제는 르완다가 콩고 동부 지역을 그들 자신들이 통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와 같은 불안정화 없이 안전을 보장 받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르완다는 콩고와 비교가 불가할 정도의 소국이고 민족 문제로 인해 콩고와 대립 관계에 놓여 있는 르완다는 콩고 정부가 제대로 된 안정을 찾을 경우, 군사적은 도발과 행동을 시도했을 때, 제대로 막을 여력과 역량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르완다는 형제 국가격인 부룬디와 연합한다고 해도 콩고가 큰 나라인데다가 UN의 도움을 받고 있기에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여전하다. 더불어 국제 사회도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의 변방에 속하는 아프리카 지역이 어떻게 바뀌든, 사람이 얼마나 죽건 아무런 관심이 없다. 제1차 콩고 전쟁이나 르완다 내전 당시 국제 사회는 별 관심이 없어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보스니아 내전이나 제1차 체첸 전쟁에서 유럽을 위시한 국제사회가 큰 관심을 보인 것과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보스니아 내전이나 체첸의 경우, 유럽과 러시아, 미국이라는 지정학적 큰 축이 움직이는 전쟁이고 그들 자체의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아프리카 내에서의 내전과 전쟁은 그들에게 있어 그저 남의 나라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폴 카가메를 중심으로 한 르완다 정부는 콩고 지역의 불안정성을 선호하는 상황이고 오히려 콩고 내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
따라서 두 나라 간의 전쟁은 언젠가 재개될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그 평가 또한 현재 맞아 들어가고 있다. 다만 조제프 카빌라의 정치적인 입지로 볼 때 대규모 전쟁을 재개할 만큼 좋지 않은데다 폴 카가메 또한 르완다 내전 시절에 파괴된 산업 재건에 치중하고 있는 입장에 있지만 폴 카가메 또한 콩고 동부 지역 영토 확장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군에 대한 무기 지원은 현재 2025년에도 지속되고 있다.
제1차 콩고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르완다 후투족 반군들은 아직도 동부의 키부 지역에서 활동 중이며 이들의 활동 영역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마주한 북부 지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들로 인해 2007년에만 26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바 있고 마이마이 반군 역시 계속해서 활동 중이며 후투족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다. 북동부 이투리 지역에서는 토착민족인 헤마족과 렌두족 간에 격렬한 충돌이 발생해 2007년까지 약 6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지금도 키부 지역과 서북부 동고, 서부 콩고 공화국 국경 지역인 콩고 강 일대에서는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2007년에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서 카빌라 대통령과 벰바 부통령의 무력 충돌이 발발하는 등, 정치적인 상황 또한 매우 불안정하며 콩고민주공화국은 2024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아프가니스탄과 유사한 아프리카의 극빈국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동부 콩고 최대 도시이자 금, 콜탄, 주석이 풍부한 북키부 주의 주도인 고마에 투치족 반군인 M23이 점령에 성공하여 키부 전 지역이 함락당할 위기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