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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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터키에서는 좌익의 지적, 문화적 영향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터키에서의 좌파는 다른 많은 곳들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제3세계에서 급성장한 마오주의 혁명론과 게릴라 투쟁에 자극 받으면서 점차 급진화되었다. 동시에 좌파적 대의에 공감하지 않는 도시 엘리트들의 불안감은 계속 커져나갔다. 터키는 북쪽으로 전통적 안보 위협이었던 소련과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안팎으로 포위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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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터키 이스탄불 건물들에 붙어 있는 막시즘의 역사 좌파 홍보 포스터,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1970년, 일군의 정계와 재계, 대학가의 보수적 인사들이 모여 바로 그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조직 하나를 창립했다. 바로 ‘계몽의 화덕(Aydınlar Ocagı)’이었다. 이 조직은 좌익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 독점을 깨고 보수적 가치를 사회에 확산시키는 것을 그 목표로 하였다. 관련 인사들을 모은 세미나가 조직되었으며, 다양한 출판물을 통해 주장을 알리려고 했고 문화, 교육, 사회, 경제 등 전방위적인 분야에서 정책을 제시하여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터키 사회의 모순을 파고들어 계급투쟁과 마르크스주의를 내건 좌파를 따돌리기에 기존의 지배적 사상인 케말리즘은 미흡한 점이 많았다. 케말리즘 정당인 공화인민당부터가 이미 좌익의 영향력에 잠식되어 가고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마르크시즘과 케말리즘에서는 찾지 못하는 매력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계몽의 화덕’ 위원장이었던 이브라힘 카페소을루가 택한 대안은 바로 이슬람이었다. 물론 종교의 사회적 참여를 극도로 경계했던 군부의 입맛에 이슬람을 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페소을루는 군부가 좋아하는 투르크 민족주의와 이슬람을 결합하여 이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었다. ‘투르크-이슬람 종합(Turk-islam Sentez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그 내용은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이전 고대 돌궐에서부터 이미 투르크인들은 이슬람의 핵심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투르크 민족이야말로 순니파 이슬람과 가장 적합하며, 강력한 무력으로 이슬람을 수호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민족이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고대 돌궐 문화와 이슬람 문화 모두 정의 관념이 강했으며, 일신론을 믿었고(돌궐인들의 천신 텡그리와 이슬람의 알라), 전통 가족의 가치를 믿었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민족주의행동당과 민족구원당을 비롯한 우익 진영은 ‘투르크-이슬람 종합’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아타튀르크는 투르크 민족과 이슬람 종교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하기를 강요했었다. 하지만 최소 600년 간 터키인의 정신세계의 근간이었던 이슬람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서구화된 엘리트들에게나 환영 받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타튀르크가 공화국의 근간으로 삼은 투르크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이슬람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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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터키의 급진주의 좌파의 성장과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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