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뻬레스뜨로이까 정책은 소련 곳곳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비(非) 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를 일깨우는 결과를 양산했다. 가장 먼저 소련에 도전한 민족들 중의 하나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군사 병합되었던 발트 3국, 특히 에스토니아였다. 발트 3국은 발트 해 연안에 있는 서방 국가와 가까웠기 때문에 서구인들의 왕래가 있었고, 특히 에스토니아는 핀란드 방송을 청취하며 서구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시대의 흐름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개혁', '개방' 정책 이후 3년 뒤인 1988년, 에스토니아는 서서히 소련을 벗어날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시도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노래 혁명' 이었다. 이와 같은 에스토니아 인들의 기개는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고. 그 중에는 에스토니아 타르투의 소련 전략 공군 기지 사령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 붕괴 당시 에스토니아에서 반소 봉기가 발생하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당국의 명령을 묵살하고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유혈 사태 없이 이루어지게 했던 인물이 있다. 그는 에스토니아에 공군 기지 사령관으로 복무했던 체첸의 전사이자 "외로운 늑대"로 알려진 조하르 두다예프(Джохар Дудаев)였다. 조하르 두다예프의 부임 사례에서 보듯이 당시 에스토니아에는 체첸인까지 포함해 그야말로 소련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민족 구성이 꽤나 복잡했다.
소련 당국에서 에스토니아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고 에스토니아 의회와 TV방송국을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지만 두다예프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심지어 시위하는 에스토니아 인들을 위해 군수 물자를 풀어 이동 급식차까지 대절해주었고, 시위대를 개인적으로 만나 차를 권하기까지 하였으며 그 뿐 아니라 에스토니아 독립을 지지하는 성명까지 발표하기까지 했다.
소련 정부에서는 두다예프를 체포하려고 시도했으며 그와 함께 독립 시위를 강제로 유혈 진압시키려고 했지만 두다예프의 부하들은 모두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이자 모든 병사들이 두다예프에게 충성하여 이미 군벌화된 상태였고 부대 또한 에스토니아 방면 전략 공군 부대라서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에스토니아 지역 소련군에서 두다예프의 위치가 매우 확고했기 때문에 소련은 추가적으로 무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소련 군부의 장, 단점을 파악하고 있던 두다예프는 여기에서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처럼 소련이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 그리고 독립에 강한 열망을 갖고 있던 에스토니아 시민들을 본 두다예프는 자신의 고향안 체첸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처럼 할 수 있다 믿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체첸의 독립은 그에게 있어 마치 신념처럼 굳어지게 되었다.
소련 당국은 에스토니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라트비아나 리투아니아와 달리 유혈 진압을 할 수 없게 되자 당국은 소련 공군 전략 공군 기지들을 1990년 에스토니아에서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방송국까지 장악 당하며 희생자를 냈던 리투아니아나 바리케이트 사건으로 인해 다수의 희생자를 냈던 라트비아와 달리 에스토니아만이 유일하게 조하르 두다예프 덕택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독립했다.
그리고 두다예프 덕택에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생각보다 적은 희생자를 내고 독립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후 두다예프는 소련군 장성의 직위를 내려놓고 체첸의 독립을 위해 고향인 그로즈니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인해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는 두다예프의 이름을 따서 1996년에 조하르 두다예프 거리를 조성했다.
비록 2004년 북오세티야의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으로 인해 체첸인들이 테러리스트로 비난을 받으면서 거리 이름이 다시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조하르 두다예프에 대한 고마움은 항상 잊지 않고 있다 한다. 그런데 만약 두다예프가 체첸인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러시아에 충성심이 강한 민족인 돈 코사크 출신이거나 러시아인이었다면 발트 3국에서는 잔혹한 피바람이 불었을 것은 자명하다.
한편 소련군을 사임한 두다예프는 체첸으로 돌아가 분리주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분리주의 운동이라는 것은 체첸 자치 공화국 현지 지도부 회의가 진행되던 회의장에 총을 들고 쳐들어가 그로즈니 공산당 서기와 공산당원들을 총살하고 체첸의 독립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91년 11월 9일 체첸의 새 의회 성립을 도와준 같은 체첸인이자 러시아 소비에트 의장이었던 루슬란 하스불라토프(Руслан Хасбулатов)를 배신하여 그를 축출하고 체첸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두다예프는 이로써 연달아 독립하고 있는 소련 내 공화국들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고 체첸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소련과 맞서게 된다. 그러나 '공화국'이라는 큰 단위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공화국들이 소련에서 분리해 나가는 상황에 있어 '자치공화국'이라는 러시아 내 소속 국가들마저 독립하여 분리, 국가 자체의 유지가 어려울 것을 우려한 러시아 보리스 옐친 정부는 체첸의 분리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체첸 전쟁을 반대하던 하스불라토프는 1993년 러시아의 헌정위기로 인해 옐친에게 함께 숙청되어 버렸다.
한편 체첸은 인근 잉구쉬와 더불어 러시아의 실효지배를 간신히 막는데 성공했으며, 카프카스계 국가인 잉구쉬와 함께 끌어들여 이른바 카프카스 연합국을 건국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들이 모두 분리 독립하며 홀로 외롭게 남은 러시아 역시 체첸의 분리를 승인하지 않게되자 두다예프와 체첸은 결국 러시아에 무력 투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자 러시아는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 내의 민간, 군공항들을 폭파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체첸 전쟁을 일으켰고, 두다예프는 자신들의 지지 세력을 바탕으로 게릴라들을 형성하여 저항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가고 러시아군은 역시 위력이 강했다.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함락시켰고, 두다예프의 세력은 남부 지방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체첸군이 반격에 성공하여 두다예프느 그로즈니로 돌아왔으나, 러시아 정보국 요원이 그의 위치를 알아냈고, 위성전화기로 외부와 통화하는 것을 A-50 조기경보기가 역탐지해 두다예프의 위치를 알아냈다. 결국 러시아 Su-25에서 투하한 레이저 유도 폭탄을 맞아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두다예프의 사망 이후, 온건파들은 러시아군과 그에 협력한 다른 체첸 조직에 의해 암살되었고 체첸 지역에는 근본주의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체첸의 독립파가 와하비즘 선교에 의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민간인에 대해 테러를 자행하면서 체첸의 독립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지지를 잃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극단주의 파벌은 카우카즈 이슬람 토후국이라는 조직으로 활동했지만 2016년 이후로는 러시아군에게 거의 토벌되었다.
체첸군이 마침내 붕괴될 기미가 보였지만 결국 젤림한 얀다르비예프(Зелимхан Яндарбиев)와 아슬란 마스하도프(Аслан Масхадов)에 의해 체첸 군단이 이끌어지면서 러시아에 끊임없이 저항해 마침내 승리를 이끌어낸다. 이로써 체첸의 독립이 성공한듯 보였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이 주도한 2차 체첸 전쟁에서 아흐마트 카디로프가 정식 체첸 공화국 대통령으로 인정되고 이치케리야(Ичкерия) 체첸 공화국은 반군으로 인정되어 마침내 현재 마지막 대통령인 도쿠 우마로프(Доку Умаров)와 함께 토벌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