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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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루 카에타누(Marcelo  Caetano, 1906~1980)를 축출한 쿠데타 세력은 제2 공화국 정권에 의해 해임된 안토니우 스피놀라(António Spínola)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구국군정(Junta de Salvação Nacional)을 세웠다. 구국군정은 일단 포르투갈 군 고위 장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스피놀라 장군과 쿠데타 주동 세력의 생각은 달랐다. 스피놀라 장군 등은 식민지와의 연방제 구성과 군부 체제의 지속을 원했던 반면 쿠데타의 주동 세력들은 독재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민주화 및 식민지 독립을 추진하고자 했다. 

 

한편 카에타누의 제2 공화국이 붕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수도 리스본을 중심으로 총파업 수준의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파업 사태는 40여 년 동안 정치적, 사회적으로 권리가 제한된 상태에 처해 있었던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공기업, 사기업을 가리지 않고 일정 규모 이상 기업에 속해 있는 거의 모든 포르투갈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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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구국군정 (Junta de Salvação Nacional) 시대의 안토니우 스피놀라(António Spínola) 장군에 대한 보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결국 1974년에 일정 규모 이상 모든 포르투갈 기업에서 대폭적인 임금 인상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노동조합 총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옛 독재 체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다고 지목된 많은 고위 공무원과 기업 임원들이 해임되었다.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더불어 이전 살라자르 때부터 금지되었던 사회당 및 공산당 등 좌파 세력이 합법화 되었고 이에 군부 지도 세력들은 강한 불만을 재기하면서 정국의 불안은 지속되었다. 

 

포르투갈 북부 지방의 농촌 지역에서는 우파 전통주의 성향의사제들을 중심으로 카네이션 혁명을 무위로 돌리고 다시 옛 이스타두 노부(Estado Novo) 시대의 독재 체제로 돌아가고자 시도하는 운동이 횡행했다. 실제로 카톨릭 사제들의 획책을 받아 북부 지역 자영농들을 중심으로 좌파들의 장교 세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몇 차례나 일어나기도 했다. 이어 9월 28일에는 MFA에 반대하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이를 계기로 스피놀라는 9월 30일에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스피놀라 장군의 대통령 사임으로 인해 MFA는 구국군정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민주화를 추진했다. 이후 스피놀라는 "침묵하는 다수(Maioria silenciosa)는 포르투갈의 좌경화에 반대한다"는 논리에 내세워 MFA 반대 투쟁에 나섰고 1975년 3월 11일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지만 실패하고 스페인, 브라질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1975년 3월 11일에 발생한 쿠데타를 계기로 구국군정은 3월 15일에 폐지되었으며 이를 대신하여 MFA가 주도한 혁명평의회(Conselho da Revolução)가 구성되었다. 

 

그러면서 좌, 우파 간 정치 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4월 25일에는 40여 년 만에 자유 총선을 치러 제헌의회를 구성했는데 이 제헌의회에서 좌파 정당인 포르투갈 사회당(Partido Socialista)이 38%, 중도 좌파 정당인 포르투갈 민주인민당(Partido Popular Democrata)이 26%, 극좌 정당인 포르투갈 공산당(Partido Comunista Português)이 13%를 득표했다. 우파인 포르투갈 중도사회민주당(Partido do Centro Democrático e Social)의 득표율은 8%에 지나지 않았다.


1975년에는 이른바 '뜨거운 여름(Verão quente)'이라 불린 좌우파 간 이데올로기성 정치 투쟁 초기 과정에 공산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NATO 창설국 출신의 유일한 공산국가가 탄생하는듯 했다. 혁명의 시발점이자 쿠데타의 주제가였던 노래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Grândola, Villa Morena)>의 배경이 되는 그란돌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쿠바라는 이름의 마을이 존재하는 것을 본다면 묘한 부분이다. 제2 공화국의 기간 동안 강력한 탄압을 받던 공산주의가 허용되면서 포르투갈 전체에 '공산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들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남부에 있던 수많은 농장들은 노동자들이 점거하여 협동농장을 설립하기도 했고 자영농들이 많았던 북부에서는 이러한 협동 농장화에 대한 움직임에 집단 반발하기도 했다. 이들은 협동농장화에 대한 반발 뿐만 아니라 극우 카톨릭 성향 사제들의 획책을 받아 혁명 그 자체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해 원내에 진출한 좌파 정당보다도 더 극단적인 좌파 세력들은 당시 당원들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했다.


1975년 11월 25일에는 구국군정의 주요 인물이었던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Otelo Saraiva de Carvalho)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는 앞서 발생했던 스피놀라의 쿠데타와 달리 극좌세력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했고 포르투갈의 좌경화에 대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쿠데타를 계기로 원내정당들은 '뜨거운 여름'이라고 불리던 극렬한 정치 투쟁을 마무리하고 타협을 모색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1976년 4월 2일에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4월 25일에 자유총선이 치러졌는데 이 총선에서 포르투갈 사회당이 36.7%, 포르투갈 민주인민당이 26%, 포르투갈 중도사회민주당이 16.7%, 포르투갈 공산당이 15.2%의 득표율을 올렸다. 그리고 6월 27일에는 보통 선거에 기반한 대통령 선거가 치루어져, 1975년 11월 25일의 극좌 쿠데타를 진압하는 것에 큰 공을 세웠던 안토니우 하말류 이아느스(António Ramalho Eanes)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사회당, 민주인민당, 중도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아느즈는 사회당의 마리우 소아르스(Mário Soares)를 총리로 임명했고 이에 따라 사회당 단독 정권이 성립되었다.


한편 이러한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해외 식민지들은 독립국가로 독립하였고 이 때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인도의 고아, 다만, 디우, 다드라, 나가르하벨리 지역에 대한 병합을 인정하였다.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중국 해안의 마카오 밖에 없었는데 이 마카오도 카네이션 혁명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밝혔지만 중국이 홍콩 반환 문제로 인해 거부하여 포기하지 못했을 뿐이었고 양국은 마카오에 대해 중국 영토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곳으로 해석하는 것에 합의했다. 

 

그리고 마카오도 1999년에 반환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에게 넘어갔다. 마카오까지 중국에 반환되면서 포르투갈 식민 제국도 종말을 고했다. 포르투갈 군대와 관료들이 가장 먼저 식민지를 포기하고 떠났으며 해외에 나가 있던 수십만의 포르투갈 노동자들, 소상공인들, 그리고 농부들도 모두 포르투갈로 귀국했는데 포르투갈 본토 사람들은 이들을 '귀환자'(Retornados)라고 불렀다.


카네이션 혁명 이후, 혁명이 발생한 4월 25일은 포르투갈의 자유의 날(Dia da Liberdade)로 국가공휴일에 지정되어 있다. 현지인에 의하면 포르투갈로 이민 온 사람들에게는 아주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구국군정 당시 카보베르데와 같은 식민지 출신 이주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대했던데다 식민지에서 귀국한 포르투갈인들까지 겹쳐 상당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로 인해 포르투갈의 지식인들 중에는 카네이션 혁명의 민주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았으면서 이주 노동자들의 탄압 문제를 비판했던 사람이 있다.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의 영화 <호스 머니(Horse Money)>에서 카네이션 혁명 이후 포르투갈 이민자들이 감내해야만 했던 어려운 삶을 상징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후일 쿠데타의 신호곡으로 쓰였던 주제 아폰수의 노래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Grândola, Vila morena)는 혁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오늘날에도 4월 25일이 되면 포르투갈 전역에서 이 노래가 불리워 진다. 포르투갈 현대사의 상징인 카네이션 혁명은 결국 여러 측면에서 국가의 호불호가 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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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이후 구국군정(Junta de Salvação Nacional)과 혼란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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