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과 내전과 콘트라 전쟁(War of Contras, 1979~1990)
니카라과 내전사 (下편)

소모사 족벌들을 처리한 내전은 니카라과를 초토화시켰다. 사망자는 4만에서 5만 명에 달했으며, 국경을 넘어 피난한 난민은 15만 명, 노숙자는 60만 명에 달했다. 1979년 니카라과 인구가 246만 2,000명 정도로 추산되니 니카라과 전체 인구의 2%가 죽고 1/3이 도피 상태에 처했다. 이미 마나과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파괴된 각종 인프라들은 내전으로 남은 것들마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재산 피해는 무려 15억 달러에 달했다.
새로운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정부는 소모사 정권으로부터 폐허 뿐만 아니라 16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까지 물려받았다. FSLN 정부는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토지 개혁을 벌여 대략 7만 명의 농부들과 4,000개의 협동 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또한 FSLN 정부는 소모사 정권 시절 부족하고 불평등했던 의료 복지를 늘리기 위해 의료 시설을 설립했으며, 무상 의료 제도를 도입했다. 소모사 정권의 피해자들에게 있어 그들이 당한 고문과 학살을 확인하고 명예를 회복하며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그리고 1980년에는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서 '문맹 퇴치 십자군'을 조직했고, 쿠바의 지원을 받아 많은 의료 시설을 설립했다. 이와 함께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는 소모사 정권하에서 저질러진 고문과 무고한 죽음을 확인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혁명 정부의 내무상 토마스 보르헤(Tomás Borge)가 말하길 "나는 산디니스타(Sandinista)의 모토를 기억한다. 싸울 때는 가차없이, 그러나 일단 승리하면 관대하라(Recuerdo el lema sandinista: Sé despiadado al luchar, pero generoso una vez que ganes)"라며 국가방위대의 병사들에 대한 어떠한 보복행위도 금지했다.
이처럼 안정되어 가고 있는 니카라과 임시정부를 보는 미국의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신정부인 FSLN 임시정부는 그 성향과 스펙트럼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가까운 좌익 세력들이었고 미국이 제재하고 있던 쿠바와 매우 가까웠다. 니카라과의 혁명이 성공하여 소모사의 족벌 체제를 깨뜨린 보다 확실한 이유는 피델 카스트로의 자금 지원과 더 큰 뒷배경에는 소련이 있었다.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쿠바와 더불어 미국을 겨누는 하나의 롱기누스의 창으로 니카라과를 점찍은 상태였다. 이와 든든한 뒷배경인 소련이 암묵적으로 지지해주니 외형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되어 보였다.
그러나 미국은 니카라과가 또 다른 쿠바가 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반혁명세력인 콘트라(Contra)에 대해 7,500만 달러의 원조를 약속했다. 미국은 FSLN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고, 니카라과의 반혁명 세력인 콘트라(Contra)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미국은 니카라과가 좌경화 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공산주의의 팽창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이른바 '콘트라 반군'의 선발과 훈련을 위한 자금으로 약 2,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이는 미국의 적대국인 이란에 대한 비합법적인 무기 수출을 통해 마련한 재원이었다.
콘트라 반군은 이와 같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항만, 교량, 송전탑 등을 파괴했다. 이 외에도 미국은 세계은행과 미주 개발 은행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니카라과에 대한 경제 지원을 봉쇄했고, 콘트라 반군의 병력도 1만 5,000명으로 증강시켰다. 이에 FSLN 혁명 정부도 군사력을 강화하여 반군에 대한 소탕 작전을 강화했다. 더구나 FSLN 정부는 콘트라 반군과 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1983년 징병제로 전환하였다. 1990년 EPS의 현역 병력은 8만 명에 달했다.
1980년대 니카라과는 혁명정부와 반공주의 반군 콘트라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콘트라는 옛 소모사 정권에 봉사했던 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반(反) 소모사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도 다수 참여했는데 이는 이념과 계층을 가리지 않았던 반 소모사 운동의 본질과 점점 선명해지는 FSLN의 좌익 노선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제 혁명 정부는 옛 소모사 정권의 패잔병 뿐만 아니라 옛 동지들도 적으로 마주해야 했다.
1979년 당시 니카라과의 임시정부는 명목상 3명의 좌익인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 모이세스 하산(Moises Hasan), 세르히오 라미레스(Sergio Ramirez)와 2명의 우익인 비올레타 차모로(Violeta Chamorro), 알폰소 로벨로(Alfonso Robelo)가 참여한 연립 정권이었다. 그러나 이 정권에 대한 문제는 연립정권이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단 3표면 충분했기에 우익 2명이 반대해도 법안은 그대로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좌익 3명은 전부 FSLN 출신이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표면적으로만 연립정부였고 실제로는 FSLN, 사회주의자들의 일당 정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1980년 4월 19일 미국의 지지를 받은 우익인 비올레타 차모로(Violeta Chamorro)가 혁명 정부에서 사임했고 3일 후, 알폰소 로벨로도 사임했다. 5월 18일 아르투로 크루스(Arturo Cruz)와 라파엘 코르도바 히바스(Raphael Cordoba Ribas)가 혁명정부에 참여했으나 크루스는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는 다시 주미대사로 떠나버렸다. 이와 같이 우익인사들이 혁명정부를 떠나면서 자연스레 혁명정부는 더욱 좌경화되었고 곧 소련과 쿠바의 지원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이는 이후 벌어진 콘트라 전쟁에서 쿠바 정부가 무려 2,000명의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FSLN을 원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혁명정부는 1980~1981년에 발생한 엘살바도르 내전에서 FMLN을 지원하였으며 이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공산권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던 미국이 니카라과 문제에 손을 대려는 이유가 충분했다. 1981년 1월 20일 취임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인 지미 카터에 비해 FSLN을 훨씬 가혹하게 대했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엘살바도르를 사례로 들어 FSLN이 쿠바와 협조하며 라틴 아메리카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을 지원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11월 17일 레이건은 반(反) 산디니스타 게릴라 세력에 대한 비밀 지원을 승인했다. CIA가 니카라과와 북쪽에 접경한 온두라스에서 콘트라에 자금, 무장, 훈련을 지원하게 된다. 1981년 한 해 레이건이 콘트라 지원 용도로 CIA에 할당한 금액은 1,980만 달러에 달했다. 외교적으로 미국은 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에도 원조를 하여 이를 기반으로 콘트라 반군에게 은신처와 군사 기지를 제공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했다.
여기에 따른 콘트라 반군은 크게 3개의 부류로 나뉘는데 첫째는 구(舊) 소모사 정권에 봉사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다. 이미 1979년 소모사 정권 붕괴 당시에 국가 헌병대 패잔병의 상당수가 투항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도주하거나 음지에 숨어 후일을 기약했다. 이들의 상당수는 1981년 8월 11일 이들 헌병대 패잔병과 우익 망명객이 과테말라 시티에서 니카라과 민주군(FDN)을 결성했다. 둘째는 구(舊) 소모사 정권에 반대하지만 FSLN의 노선에도 반대하는 단체다. 이들 중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한 사람들은 니카라과 민주연합(UDN)을 창설했고, 혁명정부에 환멸을 느낀 일부 FSLN 전사들은 북부 산악지대에 농민 민병대 MILPAS를 창설했다.
셋째는 혁명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적은 없지만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니카라과 동해안의 모스키토 저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미스키토(Miskito) 원주민은 혁명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자치권을 요구했지만, 혁명정부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미주인권위원회(IACHR, Inter-American Commission on Human Rights)에 따르면 1981년 12월 미스키토인 35~40명이 혁명정부군에 처형되었다. 콘트라와 콘트라에 대한 미 정부의 지원을 지지하는 기관이자 보수 재단인 헤리티지 재단에 의하면 미스키토인 1만 5천명이 강제 이주되었고 원주지는 크게 파괴되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원한으로 인해 적지 않은 숫자의 미스키토 원주민은 콘트라에 참여했다. 즉 콘트라라는 용어는 산디니스타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에 미국의 지원이 합쳐져 생성된 반군 집단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혁명정부에 반대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서로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각 콘트라 조직은 1987년에 가서야 우산조직인 니카라과 레지스탕스(Resistencia Nicaragüense)로 연합했는데 물론 이것도 명목상으로 통합했을뿐 실제로는 서로 간의 목적과 이념이 달랐다.
이 외에도 혁명정부에 비판적이지만 무장행동에는 나서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우익의 대표인 비올레타 차모로 같은 자들이 여기에 포람된다. 그러나 차모로 같은 자들은 무장세력이 아니기 때문에 콘트라에 포함하지 않는다. 한편 1982년 온두라스 국경지대에서는 콘트라 반군의 공격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콘트라 반군은 다리를 비롯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목표물들을 파괴했으며 1982년 말까지 거의 1,000명에 달하는 니카라과 군인과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1983년 콘트라는 CIA의 지원을 받아 전면적인 공세를 개시했고 특히 북동부와 남동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CIA는 니카라과의 석유저장고와 파이프라인을 파괴하고 서해안과 동해안에 기뢰를 부설하여 콘트라를 지원했다. 1984년 11월 4일 니카라과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총선과 대선을 실시하여 각각 FSLN과 다니엘 오르테가 후보가 승리했지만 레이건 행정부는 이들 모두를 공산 세력으로 몰아가는 행태는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엄청난 지원으로 인해 콘트라의 병력은 1984년 1만 5천명으로 증가했다. 그 중 1만 2천명은 북부, 3천명은 남부에 활동하면서 내전을 키워갔다.
1985년 콘트라는 대공세를 벌였으나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은 니카라과 정부군의 반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배 직전에 몰렸다. 이 때까지 콘트라에 살해된 사람들은 1만 3천명에 달했다. 미국 하원은 어느새 민주당이 여당이 되어 있었으며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에드워드 패트릭 볼랜드 하원의원이 볼랜드 수정안(Boland Amendment)을 3차례 가결하여 정부의 중남미 반군 지원을 금지했다. 특히 1984년 10월 가결된 3차 수정안은 미국 국방부와 CIA를 비롯해 첩보 활동에 관여하는 모든 미국 정부기관과 단체들이 콘트라 반군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는 비밀리에 적성 국가인 이란에 무기를 팔아서라도 콘트라에 자금을 지원했다가 1986년 발각되어 탄핵 직전까지 가게 된다. 이것이 이란-콘트라 사건의 전말이다. 이란-콘트라 사건 이후로도 레이건 행정부는 콘트라에 대한 지원을 지속했지만 군사적 성과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1987년 8월 중앙아메리카의 만연한 분쟁을 종식하기 위한 중미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콘트라 반군은 협상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몇 차례 공세를 벌였으나 양측에 막대한 피해만 입혔을 뿐 세력의 균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음 해인 1988년 3월 콘트라 반군과 니카라과 정부의 협상이 개시되었다. 예정된 협상 개시일로부터 며칠 전인 3월 10일 니카라과 정부는 대공세를 펼쳐 반군을 몰아냈지만 미국의 압력을 받아 다시 병력을 퇴각시켰다. 1988년 3월 23일 콘트라 반군과 니카라과 정부는 휴전 협정에 조인했다. 정부의 군축, 반군의 무장해제, 선거 약속이 휴전 협정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듬해 1989년 2월 양측은 최종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미국은 레이건의 뒤를 이어 당선된 조지 부시 행정부는 전임 레이건의 콘트라 지원을 이어나가게 되면서 여전히 니카라과 내전을 불씨를 지펴나갔다.
1990년 2월 국제선거감시단의 관리 하에 열린 대선과 총선에서 비올레타 차모로가 이끄는 전국야권연합(Unión Nacional Oppositora, UNO)이 승리하여 좌익에서 자유주의 중도 우익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 또한 미국 CIA의 공작일 가능성이 큰데 중도 우익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자 미국은 콘트라 반군의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 우익으로 정권이 교체되었으니 콘트라 반군 자체가 쓸모 없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몇달 후 콘트라 반군도 무장 해제하여 비로소 내전이 종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