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7(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16세기는 동아시아에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대항해 시대 유럽 세력이 바다를 통해 처음으로 동아시아에 다다른 시기이기 때문이다. 유럽 세력과 어떻게 조우하고 대처하였는가가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가 '왜구(倭寇)'이다. 한국에서는 노략질이나 일삼던 '일본'의 해상 도적떼 정도로 정체성이 부여되어 있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특히 서양의 동양사 연구자들은 동양 연구자들과 기본적인 인식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476459509_9405045389554444_3189147401732353370_n.jpg
사진 : 왜구(倭寇)의 활동 및 출몰 지역, 출처 : 日本史 - 일본 중고등학교 교과서

 

왜구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왜구라는 존재가 서양문물의 전래 또는 전파의 계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같은 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15세기 이전의 왜구와 16세기 이후의 왜구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전자, 즉 전기 왜구는 주로 일본지역에서 발흥한 해적집단이 주를 이루나, 후기 왜구는 국적 구성, 활동 영역, 활동 내용 면에서 완전히 다른 성격의 집단이다.


우선 후기 왜구는 중국인들이 주를 이룬다. 일본인과 동남아인들이 일부 섞여 있었다. 여러 갈래의 집단이 있으며 본거지에 따라 동남아 거점, 중국 해안 거점, 규슈 거점의 왜구로 나눌 수 있다. 중국인들이 다수인데 왜 왜구라고 부를까? 그것은 명나라의 사가들이 명나라의 법도에서 벗어난 불법적인 집단을 자국민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기존의 멸칭인 왜구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후기 왜구의 발흥 원인은 명나라의 해금 정책 때문이다. 명나라는 조공무역 체제의 유지를 원하였기 때문에 바닷길을 통한 사무역을 규제했다. 심지어 연안의 어부들이 고기잡이 출어를 나가는 것도 금지하고 연안의 섬을 무인화하였다. 


명나라는 제국의 위엄과 외적 방어의 명목으로 폐쇄 체제를 추구하였고 그러한 와중에 남중국 연안 주민의 생존권이 심대한 침해를 받는다. 중국의 복건성, 절강성 연안은 토질이 매우 척박한 곳이다. 농사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어렵다. 더구나 당나라 시대, 원나라 시대, 송나라 시대 시기에 무역으로 경제적 부를 누린 경험이 있는 곳이다. 명나라 조정의 해금이 이들에게는 수용할 수 없는 압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동아시아의 해적 '왜구(倭寇)'의 역설 - 동북아시아의 중근세 해상 항로를 형성시킨 해적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