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역의 하늘 괘에는 중심을 이루는 개념이 하나 있다.
만물이 하늘을 거느리고 있다는 만물자시(萬物資始) 내통천(乃統天)이라는 문구다. 이는 주역의 전체 의미 체계 안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의 메시지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정체성은 얼마나 신령하다는 뜻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일상적인 삶의 근본 교훈으로 수용하려면 우리 자신의 본질인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불교적인 방법론을 통하는 게 매우 효율적이 된다.
실제 불교는 세상에서 펼쳐지는 모든 현상과 본질에 관한 설명을 심성론(心性論)으로 단순화시켜 설명하는 특징이 있다. 특히 그 점은 마명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그렇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대승기신론의 주된 이론 체계는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의 개념이다. 이는 우리 내면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며,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마음의 일상적인 움직임과 관련시켜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행상의 열쇠다.
그 가운데 주역 만물자시(萬物資始) 내통천(乃統天)을 떠올려주는 개념은 당연히 일심(一心)에 대한 기신론의 설명이다. 왜냐하면 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一心)이란 세상의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근원의 개념으로서 우리가 인지하는 일체의 모든 법상이 오직 마음의 작용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1. 일심(一心) –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근원
화엄경에 의하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삶과 죽음까지도 결국 이 마음의 작용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우리가 마주하고 살아가는 하늘과 같아서 그 본질이 언제라도 변하는 법이 없지만, 그 위에 무수한 모습의 구름처럼 다양한 형태의 법상을 경험하게 된다는 이치의 설명이다. 그리고 그 작용을 주목해 보면 흘러가는 모양이 두 갈래로 나타난다고 하여 명칭이 이문(二門)이다.
2. 이문(二門) – 마음의 작용이 보여주는 두 갈래 형태의 구분
기신론의 설명을 빌리면 첫째는 죽고 사는 분별을 특징으로 하는 생멸(生滅)문이고, 둘째는 작용의 신비로움에 의존한 진여문(眞如門)이다.
생멸(生滅)문이란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가면서 집착과 번뇌가 생겨나게 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분별문(分別門)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바깥의 사물을 상대하면서 그 특징을비교하고 판단하면서 좋고 나쁨 및 선과 악을 가리는 데서부터 시작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을 통해서 알 수 없는 집착과 번뇌에 빠져드는 고통스러움을 겪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는 진여문(眞如門)이다. 달리 이를 기신론에서는 해탈문(解脫門)과 동일시하게 되는데,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이 참되게 형성되는 까닭에 삶의 고통이 생겨나는 부정적인 경지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낄 때의 표현이다. 그때의 열쇠는 당연히 사물을 상대하면서 생겨나는 마음의분별이 본래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데 있다. 그 결과 자기 자신을 고통으로 빠져들게 하는 집착이 아닌 마음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평온함을 경험할 수 있는 지혜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마음의 움직임에 숨어 있는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인 삼대(三大)의 개념이다.
3. 삼대(三大) – 마음의 세 가지 작용
먼저 기신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들 삼대(三大)의 개념에 대한 문제다.
첫째는 체대(體大)다. 기신론의 체대(體大)는 우리가 거느리고 있는 하늘을 대신한 마음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의 체대(體大)는 본래 실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같은 마음의 근본적인 특징이 어떤 순간에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근원적인 본질의 개념으로 해석을 한다.
둘째 상대(相大)는 법상(法相)의 뜻으로서 앞의 본질에 해당하는 마음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모습의 현상에 해당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감정으로부터 이미지 등의 모든 생각의 내용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용대(用大)이니 마음이 보여주는 작용(作用)의 개념이다. 우리 마음의 특징이 본래 어떤 모양의 실체가 없음에도 구체적인 생각과 행동 등으로 현실에 법상을 펼쳐 보이는 신비스러운 움직임을 뜻한다.
그리고 이 같은 삼대(三大)의 작용이 집착으로 인한 고통 혹은 그렇지 않은 편안한 삶을 동시에 불러오는 이문(二門)이 된다는 뜻인데 초점은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의 문제로 좁혀진다.
참고로 이 같은 기신론의 관점은 주역의 본문을 이해하는 방법론으로도 매우 적절한 접근법이다. 계사전에서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고 표현할 때 그 두 개의 개념을 기신론의 이문(二門)으로 대신해도 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집착으로 빠져드는 분별에 근거하고 있다면 이는 음적(陰的)인 시각의 적용이다. 그렇지 않고 하늘의 도움을 불러올 수 있는 편안함 쪽의 안목이라면 그것은 양적(陽的)인 시각의 반영이다.
글자 뜻을 중심으로 생각하더라도 그렇다. 불교에서 회피하게 하는 분별 중심의 안목이란 세상을 매사에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는 음적(陰的)인 쪽의 움직임이다.
반면 세상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마음이 따뜻해지는 쪽의 안목이라면 그것은 기신론에서 말하는 해탈문의 개념과 뜻이 통한다. 다만 주역에서는 해탈의 개념 대신 하늘의 도움을 강조함으로서 자력이 아닌 타력의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사실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불교의 세계관은 주역과 달리 극단적일 만큼 지혜 중심의 가르침이다.
즉 일체의 법상이 본래 실체가 없다는 마음의 눈을 유달리 강조하는 접근법부터가 그렇다.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그 깨달음 위에서 자신의 평온한 삶을 주체적으로 획득하게 하려는 가르침의 당연한 결론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마음의 안목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안목의 중심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눈앞의 모든 사물을 분명한 실체로서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눈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삶과 죽음을 대하는 생노병사의 문제라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점을 인식했을 때 근간을 이루는 타력적인 요소가 바로 자기 마음의 신비로운 힘의 부분일 수가 있는데 이는 흔히 하늘과 구름의 비유로서 종종 대신하게 될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우리 마음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펼쳐지는 것은 하늘을 바라볼 때 구름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는 일이다. 바탕이 본래 새파란 하늘 위에서 펼쳐지는 시커먼 먹구름과 같은 우리의 생각들이 무수하게 생겨났다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늘 자체의 본바탕은 조금도 달라질 수가 없는 이치의 비유다. 그것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신비로운 힘을 상실해본 적이 없는 우리 마음에 대한 믿음에 토대를 둔 하나의 적절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늘과 구름의 관계를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삶의 일상에서 무수하게 겪게 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쉽게 다스릴 수가 있다.
이를테면 그때는 불교의 선(禪)이나 맹자가 주장하는 회광반조(廻光返照) 내지 반구저기(返求諸己)의 개념을 떠올려야 한다.
이는 자기 자신이 느끼는 삶의 어려움을 본래 신비로운 자기 마음의 힘과 그 마음이 작용할 때의 잘못된 틀에서 찾는 방법이다.
실제 자기 삶이 고통스러움을 느낀다면 그 원인을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마음의 눈에서 찾을 수밖에 없어지는데 그게 바로 앞의 회광반조(廻光返照)이고 자기에게서 구하는 반구저기(返求諸己)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돌이키고 나면 생겨나는 결론이 앞의 내용이다. 즉 자기 마음에 본래 갖춰져 있는 신비로운 작용의 힘을 되살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본래 어떤 실체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게 우리 마음이지만 그 힘의 신비로움은 결코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가 없다. 이에 그 같은 우리 마음의 신비로운 힘을 돌이켜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생겨난다.
첫째는 세상의 모든 법상이 비롯되는 우리 마음의 본질에 갖춰져 있는 힘에 대한 믿음의 문제다.
둘째는 자기가 품고 살아가는 마음의 틀에 따라서 자기 삶의 질이 달라지게 되어 있는 마음 씀 즉 지혜에 관한 문제다.
셋째는 자기 삶의 질이 고양될 수 있도록 진정한 형태의 평온함을 스스로 갈망하는 마음이 간절해야만 하는 삶의 동기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의존하여 살아가는 신비로운 마음의 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압축된 내용의 송(頌)
마음은 하늘, 생각은 구름
본래 고요한 하늘 위에
구름이 일어났다 홀연히 사라지듯,
우리 마음의 묘한 작용 또한 그러함에.
구름 일며 숱한 생각 일어나 쫒다 보면
거기에서 느껴지는 두 갈래 삶의 성격
하나는 생멸문 고통의 원인이요
둘째는 해탈문 번민 없는 경계이니
이 같은 우리 마음의 알 수 없는 묘한 작용
어둠 속 분별 아닌 우리 마음 본래의 힘을 따를지니
보고 듣는 일상의 온갖 경계에서
마음의 묘한 작용 세 갈래로 살펴보되
바닷물 같은 우리 마음 그대로가 하나요,
그 위에서 일어나는 파도가 두 번째며
물이 파도 되고 파도 또한 물이 되는
신비로운 작용이 세 번째 요소라네
그로 인해 목격되는 삶과 죽음의 그림자
둘인 듯 분명해도 본래 허상임을 알아
구름 낀 분별에서 벗어난 뒤 안목이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상의 모든 경계
텅 빈 하늘의 청명함 그 마음 아니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