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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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그래픽이다.(그래픽=저널인뉴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 긍정과 부정


주역에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이 도"라는 문구가 있다.


이를 우리 마음의 작용으로 표현해 보면, 어떤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음(陰)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의해 규정되는 음(陰)과 양(陽) 중 어느 쪽을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


이는 결국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다.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결론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결론이 진실로 여겨진다. 이는 삶 속에서 모순적으로 보이는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본질적인 안목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주역에서는 하늘의 기운이라는 실체 없는 존재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불교에서는 본래 실체가 없는 공(空)의 이치를 깨닫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처럼 들릴 수도 있다. 따라서 그 모순의 문제를 깊이 새기면서, 이를 보다 더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 있도록 한 편의 소설을 예로 들어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1980년대 발표된 이문열의 중편소설 『금시조』이야기다.


그 소설은 서예의 거장 석담과 그의 제자 고죽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예술관을 가지고 대립하며, 예술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인물들이다. 이야기의 도입부는 서예가 고죽이 임종을 앞두고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여의고 숙부에게 맡겨졌으나, 숙부가 독립운동으로 망명하자 서예가 석담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석담은 고죽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하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서예를 가르치기보다 하인처럼 부린다. 그러나 친구 운곡의 권유로 결국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석담은 예술이 인간의 역사와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믿는 반면, 고죽은 예술 자체가 이상(理想)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예술론이 아니다. 오히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금시조’라는 상징물에 대한 이야기다.


고죽은 스승과의 갈등 끝에 방황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다시 문하로 돌아오지만, 그의 예술관은 변하지 않는다. 이후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석담의 유언에 따라 그의 관상명정을 쓰게 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화해 아닌 화해가 이루어지지만, 고죽의 내면적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이윽고 죽음을 예감한 그는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어느 하나도 완벽하지 않음을 깨닫고 결국 모두 불태워 버린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이 추구하던 순수 예술의 경지를 상징하는 ‘금시조’를 목격한다. 이 장면에서는 작품이 재로 변하는 장면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과, 오히려 후련함을 느끼는 고죽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소설 속 ‘금시조’와 얽힌 용의 이미지가 주역의 하늘 괘에서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정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역에서 하늘괘(乾卦)에 등장하는 용은 매우 긍정적인 존재다. 이는 하늘이 땅을 통해 만물을 생성하는 신비로운 작용을 하는 역할의 상징이다. 반면, 이문열의 소설에 등장하는 금시조는 불교의 『화엄경』속 용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화엄경에서의 용(龍)은 가루라 즉 금시조에 의해서 잡아 먹히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상징물이다. 그러므로 용이 금시조에게 잡아 먹혔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품게 되는 끝없는 욕망과 번뇌를 극복했다는 뜻의 반영이다.


주역에서 도를 일음일양(一陰一陽)으로 표현했을 때 우리 마음이 사물을 바라보는 양면성 즉 긍정과 부정의 완벽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왕 용의 양면적인 이미지로 우리 마음의 작용에 대해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으니, 그에 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 『화엄경』 속 금시조(金翅鳥) 역할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화엄경』에서 금시조는 인도 신화의 가루다(Garuḍa)와 동일한 존재로 등장한다. 이 신성한 새는 강력한 힘과 지혜를 지닌 존재로,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탐욕과 번민을 초월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화엄경』 속에서 금시조는 용을 잡아먹는 존재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부분이 인간이 가진 욕망과 번뇌를 상징하는 화엄경에서의 용(龍)이 지닌 이미지와 하늘 괘의 용이 전혀 다르게 묘사되는 이유이다.


경전의 본문을 참고하면, 금시조는 거대한 크기로 묘사되며, 한 번 날갯짓을 하면 『장자』의 붕(鵬)과 같이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이는 우리가 일상의 온갖 경계를 넘어, 33천(三十三天)의 세계를 초월하여 해탈(解脫)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마음의 작용이 펼쳐졌을 때 직면하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적인 움직임을 대신하는 상징물로는 이보다 적절한 비유가 없음을 알게 하는 두 곳 경전의 상이한 이미지다.


그러므로 그 관점을 주역의 도에 개입시켜 보면 “일음일양(一陰一陽)이 도”라는 그 시각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하나의 사례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같이 상이한 두 경전의 시각에 입각해서 우리 마음의 보편성에 접근해보면 거기에서 얻어지는 분명한 교훈 문제가 있다.


경전의 상징조차도 이와 같이 상이한 구석을 지니고 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현장에서 결국은 극복해야 하는 이 같은 모순의 문제를 고전으로 분류되는 옛 경전에서는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제시하는가의 문제다.


결론을 말해보면 불교에서는 이를 ‘공(空)의 이치’로써 해결하려 하며, 주역에서는 ‘내통천(乃統天)’이라는 개념을 통해 하늘의 신비로운 힘을 상기하게 하는 관점의 반영이다.


해당 경전의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본다면 이는 곧 사물의 진실한 모습인 여래를 보는 것이다. 금강경의 사구게 가운데 한 구절이다. 본문 내용으로는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다.


한편 주역의 해당 문구는 하늘괘 단전의 다음 구절이다.


거룩하구나. 하늘에서 시작되는 근원이여, 만물이 힘입어 시작하나니 이에 하늘을 거느렸구나. 모든 사물의 머리로 나옴에 온 세상이 모두 평안하니라.


대재(大哉)라 건원(乾元)이여 만물자시(萬物資始)하나니 내통천(乃統天)이로다. 중략 수출서물(首出庶物)에 만국(萬國)이 함녕(咸寧)하나니라

 

압축된 내용의 송(頌)


 음양(陰陽)으로서 작용하는 세상의 모순


현실에 임하는 우리 마음도 예외가 없나니


상황에 직면해 추구하는 마음의 평온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 이외에 답은 없다


같은 듯 다른 상징 경전도 이는 마찬가지


역에서는 용을 보고


만물을 여는 힘으로서 묘사하고,


화엄경은 욕망과 번뇌의 상징으로 묘사하니


그 모순 뛰어넘는 금시조(金翅鳥)의 날개짓이야


음(陰)과 양(陽) 긍정과 부정 ,


모순의 극복 위한 조화에 있을 테니


진정한 의미의 우리가 구하는 평온


둘인 듯 하나인 근본에서 찾아보되


그것은 다름 아닌 구도(求道)의 핵심


음(陰)이라도 음(陰)일 수 없고,


양(陽)이라도 양(陽)일 수 없는


실체 없는 마음의 눈 지혜에 눈을 뜨자


그것은 불교의 공(空)도리


하늘을 거느린 우리 마음의 묘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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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 긍정과 부정 - 불교 화엄경과 주역 용(龍)의 이미지 차이를 통한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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