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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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나 한국이나 역사에서 역대 군주들이 하나같이 원하고 있던 것은 중앙집권화다. 그로 인해 기존의 학문보다는 중앙집권 독재와 일원화할 수 있는 학문이 필요했다. 불필요한 다수보다 한 곳에 집중하게 하는 것은 무소불위의 독재에 대한 저항을 무마시키고 견제장치들을 약화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동양에서는 황제나 군주의 전제 정권으로 인한 1인 독재화가 그것이고 서양에서는 선전(Propaganda)과 선동(Agitation)으로 인한 일체화(Integration)이다. 그것이 종교라면 유일신의 기독교고 정치라면 특권계층의 귀족(Nobility)과 의회(Assembly)다. 


화면 캡처 2025-03-13 040619.png
사진 : 고대 중국 한나라 무제, 출처 : 바이두, 漢 武帝

 

동양에서는 황제나 군주의 전제 정권으로 인한 1인 독재화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학문이 유학이다. 유학이라는 학문이 전면 대두되어 정계에 나타나게 된 배경이 통일제국을 꿈꾸던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라는 것이 일전에 제자백가 사상의 다양함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고 오로지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忠이라고 주장한데서 있다. 여기에는 한 무제의 불안한 권력구조가 배경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한 무제는 선제인 한나라 효경제(孝景帝)의 11번째 아들로 황제 될 수 있는 서열이 아니었다.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한 한나라에서 그가 황제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궁중 내의 암투로 인해 황후가 폐위되고 전혀 제위 가능성이 없었던 유철(한 무제)가 태자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생 역전으로 인하여 황제에 즉위하니 권력 기반 자체가 불안한 상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불과 16세의 나이였다. 어린 나이의 황제에 주변으로는 먼저 태자였던 자를 폐하고 그를 옹립한 외척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런 불안한 배경에서 한 무제는 성장했고 결국 권력을 몰래 강화하여 외척들을 타도했다. 그러면서 등장한 사람이 유학자였던 동중서(董仲舒)였다. 동중서는 유학의 사상적 통일을 주장했고 이러한 주장은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한 무제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한 무제는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유학을 대대적으로 장려하기에 이른다. 즉 유학을 방패삼아 그 이론으로 자신의 절대 권력을 강화했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철퇴를 가했다. 즉, 무제에게 있어 유학의 존재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쌓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절대 권력을 쌓기 위해서 특별하게 강조되었던 것이 앞서 언급한 충(忠)이라는 대목이다.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대목을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충성의 아래의 신하들은 忠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독히 충(忠)에 대한 언급이 잦고 가장 강조 및 적극적으로 장려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 무제의 정치적인 입지가 굉장히 불안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절대적인 충(忠)에 대한 단어의 집착은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무자비한 광기와 광폭 행보,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에 의한 열등의식의 발현과 황제 즉위에 관련하여 비정통이라는 피해의식 등이 한데 어우러져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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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트라우마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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