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중국’이란, ‘중화인민공화국과 홍콩, 마카오, 대만은 모두 하나의 국가이며 분리될 수 없다’는 중국의 정치 및 외교적 근본 이념으로 나타난다. 대체로 대만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이용되고 있지만,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분리 및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중국의 영토관 및 사상관을 뜻하기도 한다.

위구르 등 소수민족들은 18세기 청나라 건륭제에게 복속되기 이전까지 수 천 년 동안 인종과 언어, 그리고 문화, 역사 등에서 한족(漢族)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하지만 마지막 전근대 국가인 청나라의 강역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중국’ 또는 ‘중화민족 대가정’이라는 범주에 편입됐다.
‘하나의 중국’은 이들을 놓지 않으려는 현대 중국의 명운을 건 몸부림이면서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뿌리 깊은 정치적 토대이기도 하다. 고대부터 중국인들은 통일 국가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누 한족의 거주 영역에 한정된 개념이었다.
왕조 시대 중국인들은 작게는 중국 대륙, 크게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천하(天下)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천하를 다스리는 인물은 오로지 하나의 군주인 황제(皇帝)로 여기며 그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지배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 중국의 포괄적 지배 관념과 ‘하나의 중국’은 논의의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에 연결하기 어렵다. 전근대적 관념의 통일은 천자의 통치 범위 내에 있는 한족의 통일 만을 지칭한다. 한족들은 천자 범위 밖의 이민족을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 동이(東夷) 라 부르며 오랑캐로 간주했고 이들에게 천자를 숭상하는 예우와 조공 및 책봉을 내렸을 뿐 통일을 원하진 않았다.
그러나 소수민족을 포함하는 '하나의 중국' 관념은 근대로의 세기 전환이 이뤄진 19세기 말~20세기 초 경 등장했다. 신해혁명 당시,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흥하게 하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기치를 내건 혁명파는 청나라에 대한 타도를 성공하자 새로운 민족 국가 건설 이전, 민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오랜 논쟁 끝에 ‘민족’의 정의가 ‘한족’에서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민족’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쑨원(孫文) 역시 한족의 민족 국가 대신 만주족과 장족(티베트), 몽골족, 회족, 한족 등을 아우르는 5개 민족이 화합해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 나가자는 오족공화(五族共和)라는 이념을 창안했다.
이는 한족 국가였던 명나라의 2배에 달하며 오늘날 중국 영토의 약 63%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의 영토를 상실하고 싶지 않았던 혁명파의 의지로 해석되고 있다. 혁명파는 청나라의 영토와 지배력 그리고 만주족 휘하의 통합된 소수민족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한족의 민족 국가 대신 ‘중화민족’의 국가로 새롭게 정의한 것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만이 서구 열강이나 일본, 러시아 같은 강대국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맞서려면 '하나의 중국' 이라는 중국의 방침을 해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막연히 반중을 외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