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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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가 건설되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건설되었고 어떤 자들이 들어왔으며 도시 집단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연구하여 논고에 담고 있는데 내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던 고대 지중해 지역, 기존 그리스 문화 및 페니키아 문화와도 사뭇 다른 모습을 갖고 있어 특이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그리스나 여타 지역에서 타 민족의 침공이든, 기후 변화로 인한 이동으로 생성된 자들이든 이러한 자들이 모여 살다가 도시화되었다 보고 있다. 

 

그러나 발굴되었을 때 로마에는 소규모 촌락의 흔적이 B.C 800년 이전에도 있었고 이들이 로마인들의 기원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로마인들은 초가집과 같이 흙과 밀짚을 엮은 집에서 살았는데, 당시에는 이것보다 못한 지역도 많았지만 이미 거대한 성을 짓고 국가 단위의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 같은 오리엔트의 도시들에 비하면 매우 작은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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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로마의 포로 로마노 유적,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당시 로마인들은 이와 같은 늑대 신화와는 다르게 부랑자, 난민들이 모인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를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는 로마인들에게 마땅한 배필이 없자 로물루스가 지혜를 내어 사비니 족의 가족들을 초청해 파티를 벌인 틈을 이용하여 무방비가 된 사비니 족 여자들을 약탈해 배필로 삼아 버렸다는 신화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화에 지나지 않고 있으나 실제 역사에서도 로마에 정착한 사람들은 각 도시에서 흘러나온 부랑아, 난민들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로마 시가 주변의 도시들에 비해 상당히 건국 시점이 늦다는 것과 동시에 시의 발전이 강력한 집단의 조직적인 도시 건설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인구 증가로 인하여 상황에 맞춰 필요한 시설을 건설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로마와 인근 도시 국가들과의 차이점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신화나 기록과도 제법 그런 형식으로 맞아 떨어지는 부분도 있다. 이에 로마인들은 대단히 초창기 역사 시기부터 상당히 많은 내부 공동체나 혈족 집단을 보유했는데, 일반적인 정주민들이 소수의 대가족들이나 같은 씨족 촌락을 중심으로 해서 성장함에 따라서 소수의 권력자 집안이 그 지역 공동체를 권위와 씨족의 세력을 중점으로 두고 지배하는 사례들이 흔했다는 것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 볼 수 있겠다. 

 

당장 로마 공화정의 상징인 원로원이 왕정 초기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로원의 형성 과정으로만 본다면 최소 수십에서 100여 명 정도에 해당하는 유력자들이 한 공동체에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도시 하나의 크기가 씨족 몇 개 모아 놓은 그저 마을 수준일 때도 그렇다. 이는 그만큼 로마에 모인 사람들의 출신지들이 불분명하고 각기 다른 인원들이 모여서 형성되어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당장 당대 그리스를 두고 비교해 볼 때 빠르게 초기 공화정이 설립될 정도로 옛 도시 국가들의 정치나 통치 체계가 다른 부분이 있지만, 로마는 그 점에서도 매우 특이한 사례였다. 이는 어느 특정한 부족이나 같은 선조의 신앙 및 관습을 공유하는 느슨한 민족 관념이 처음부터 적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같은 이탈리아 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에트루리아들이 반도 여기저기에 분할되어 소규모 집단이 된 것은 씨족의 수효가 증가함에 따라 주민들이 작은 지역에서 보다 넓은 지역으로 나가는 것과 같이 씨족 간의 갈등, 유산 분배, 상속권 제외 등으로 인해 새로이 개척지를 따라 분할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로마는 그와 같은 형식의 부족 공동체의 분열로 인해 생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당장 로마의 초대 왕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볼 때 그 혈통을 증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트로이의 후예로 지칭되어졌고 늑대에 의해 키워졌다는 신화도 처음부터 당장 공동체 내에서 출신 성분도 불분명하였기 때문에 그 신분도 미천했음을 은연중에 드러냈다고 본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인물이 실력과 명성, 명분을 부족해도 왕이 되었을 정도로 테베레 강 지역에서는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고 이는  초기 로마가 에트루리아 혈통이나, 부족, 계급 및 신분에 의한 공동체 내부의 차별이 생각보다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무계급 제도는 출신 성분도 대단히 다양하고 서로 신분 따지며 수직 상하를 정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앗다. 이와 같은 자들이 공동체 대다수를 차지했다면 로마의 민주주의가 평등한 조건에 출발했다는 것이 충분히 납득 가능한 내용이라 생각된다. 

 

또한 로마의 초기 역사는 로마인들이 애초부터 특정한 종교, 부족, 관습을 계승하면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여타 도시 국가 등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배워 옮겨온 기록들로 인해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 또한 처음부터 뿌리가 될 만한 공통의 선조가 없었다면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계승했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이 발전하다 보니 그와 같은 관습이나 종교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고, 또한 로마 고유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다른 도시 국가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만 했다. 


또한 이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다른 도시 국가나 부족 국가들로부터 상당한 부분들을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비니의 여인을 노략질한 신화는 로마의 성비가 대단히 불균형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또한 흥미로운 대목으로 일반적인 국가의 기본 단위인 마을 단위 공동체는 혼인으로 만들어진 대가족들과 연을 맺은 여러 가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성비가 맞춰진 상태에서 성장하게 된다. 

 

물론 남아 선호 사상 등을 이유로 남아를 많이 낳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공동체와의 갈등, 사냥, 농업 및 여러 고된 생산 활동 등에서 항상 최전선에 나서야 하는 남자는 여러모로 죽거나 부상을 입기 쉽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보호를 받는 여성이 조금 더 오래 생존하는 이유로 인해 이와 같은 형태의 마을 단위 공동체는 생각보다 쉽게 여자가 더 많은 여초 환경이 되기 쉽다. 그런데 로마는 다른 도시 국가들에 가서 여자들을 약탈하는 수준에 연명할 정도로 남초 현상이 극심했고, 이는 심지어 레물루스의 즉위 이후 더욱 잦아진 전쟁이나 전투로 인해 남자 사상자가 발생했는데도 그러했었다.


더불어 이는 가족이나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난민이나 부랑자, 탈주자로 로마가 시작되었다면 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 된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다량의 부족과 국가 중에서 멸망과 학살로 인해 흩어진 트로이 인들을 자신들의 선조로 삼은 이유 또한 일종의 동질 의식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당시 로마는 7개 언덕이 있었는데 로마로 이주한 사람들은 언덕 최상위 지역에서 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방어적인 측면으로 볼 때 언덕 최상위 지역에서 거주하는 것을 선호하였고 로마인들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로마 시의 옆을 흐르는 테베레 강은 로마를 곡선처럼 둘러 지나가면서 홍수를 자주 일으켰기 때문에 배수 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는 이상 저지대 거주가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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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시(市)가 건설되었을 당시의 민족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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