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수준이 경제 규모(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과도한 주택 투자와 정부의 부동산 경기 부양책이 맞물리면서 GDP 대비 가계대출 비율이 90%를 웃돌아 경제 성장과 통화정책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올해 부동산 규제 완화 정책으로 인해 가계대출이 다시 급증할 경우, 한국은행이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기준금리를 낮추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6일 국제금융협회(IIF)가 발표한 세계 부채(Global Debt)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4분기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91.7%로, 조사 대상 38개국(유로존은 단일 통계) 중 2위를 기록했다. 한국보다 비율이 높은 국가는 캐나다(100.6%)가 유일했다.
한국은 2020년 이후 약 4년간 100%를 초과하며 세계 최대 가계부채 국가의 불명예를 안았지만 2023년 국민계정 통계 기준 연도 개편 등으로 비율이 93.6%로 하향 조정되면서 2위로 내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신흥시장 평균(46.0%)이나 아시아 신흥시장 평균(57.4%), 세계 평균(60.3%)을 크게 웃돌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의 2023년 3분기 말 기준 자료에서도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90.7%로 44개국 중 5위였다.
BIS 조사에서는 스위스(125.7%)가 1위였으며, 호주(111.5%), 캐나다(100.1%), 네덜란드(94.2%)가 한국보다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한은의 연구에 따르면, GDP 대비 가계신용 비율(3년 누적)이 1%포인트 상승하면 45년 뒤 GDP 성장률(3년 누적)은 0.250.28%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가계신용 비율이 80%를 초과할 경우, 소비 위축 등으로 단기적으로도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80%를 넘으면 경제 성장과 금융안정에 제약이 될 수 있어 90%를 거쳐 점진적으로 80%까지 낮추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한국은행이 2023년 8월 역대 최장인 13연속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한 주요 배경에도 가계부채와 부동산 시장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2분기 역성장(-0.2%)이 발생하며 선제적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한국은행은 금리 인하가 오히려 집값 상승과 가계대출 급증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실제로 2023년 8월 금리 인하 실기론이 제기됐지만, 이창용 총재와 한국은행은 가계부채 위험이 경기 위험보다 더 크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가계부채가 과도할 경우, 금리를 낮춰야 할 시점에 부실 위험을 고려해 머뭇거리게 되고, 금리를 올릴 때도 대출자 부담을 고려해야 하는 이중고가 발생한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올해 들어 가계대출과 부동산 가격 상승이 다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2월 금융권 전체 가계대출 잔액(1672조 원)은 1월보다 4조 3천억 원 증가했다. 이는 1월(9천억 원 감소)과 대비되는 흐름으로, 연초 대출 규제 완화와 이사철 수요 증가가 원인으로 분석된다.
3월 들어서 대출 증가 속도는 다소 둔화되었지만, 여전히 증가세는 지속되고 있다. 3월 13일 기준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가계대출 잔액은 737조 868억 원으로 2월 말보다 3,349억 원 증가했다.
2월 증가 폭(3조 931억 원)보다 낮은 수준이지만, 주택구입자금 신규 대출이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부동산 규제 완화 역시 가계대출 증가를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 특히 최근 서울과 경기 지역의 주택 시장에서는 거래량이 증가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2~3개월 후 주택담보대출이 다시 급증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금리가 낮아지고 공급 부족에 대한 불안 심리가 커지면서, 하반기 대출 규제 강화 전에 집을 사려는 수요가 많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도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 이후 대출 상담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실제 계약이 진행되면 5월부터 본격적으로 대출이 증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한, 정부의 부동산 경기 부양 정책과 맞물려 가계대출 증가를 억제하는 금융당국의 정책이 모순적인 상황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은 최근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서 "은행들의 가계대출 관리 조치 완화와 서울 일부 지역의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가 주택 가격 상승 기대와 가계부채 증가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박종우 한국은행 부총재보 역시 "서울 일부 지역에서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 영향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2월 서울 아파트 거래량이 예상보다 많이 늘었다"며 "아파트 거래가 증가하면 1~2개월 후 가계대출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만약 우려대로 5월부터 가계대출이 빠르게 증가하고 부동산 가격이 상승한다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2~3분기 추가 기준금리 인하 결정을 내리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