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전체를 정복한 청나라는 고비 사막 이남의 내몽골과 이북의 외몽골을 분리하여 통치하였다. 이는 과거 대제국을 건설했던 강력한 유목민족이었던 몽골 부족들이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들이 서로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월계금지(越界禁止)를 실시하여 몽골족들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 이로 인해 몽골족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소규모 부족단위, 씨족단위로 분리된 상태로 청나라의 변방으로써 가장 낙후되고 미개한 사회로 남게 되었다.
대다수 몽골족들은 오로지 목축업과 원시적인 가내 수공업에 의존하여 생활해야 했고 무거운 공납과 부역에 시달리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19세기 말 외몽골을 방문했던 외국인 여행자들은 과중한 공납과 막대한 빚으로 인해 외몽골 민족 전체가 절멸 지경에 내몰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래 청나라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중국은 열강들에게 침탈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러시아가 북만주와 외몽골을 잠식해 나가자 1895년 외몽골 귀족들은 모스크바로 비밀리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외몽골이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이는 복잡한 국제 정세와 열강들의 상황을 모르는 유목민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영국과 일본의 견제를 받고 있던 러시아는 외몽골의 요청을 수락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회를 기다리라며 의례적인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1911년 8월 외몽골의 라마 불교의 수장인 제8대 복드 젭준담바 호탁트(Bogd Jibzundamba Khutugtu)을 중심으로 독립투쟁을 주도하던 정치 지도자들이 이흐 후레(Ikh Khuree, 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자력으로 당장 청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다시 대표단을 러시아로 보내어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은 후, 외몽골의 여러 부족들과 함께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는 당시 청나라와의 관계와 극동에서의 현상 유지를 위해 당장 외몽골이 독립하기보다는 명목상 청나라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자치국이 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붕괴되자 외몽골의 독립 지도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11년 11월 30일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또한 이흐 후레를 니스렐 후레(Niislel Khuree)라고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다. 외몽골은 복드 젭준담바 호탁트를 몽골제국의 황제로 추대하여 신정일치(神政治制)의 국가가 되었다.
몽골의 새로운 국가 원수인 복드 칸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유사한 몽골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였다. 외몽골이 독립하자 내몽골에서도 도처에서 독립 투쟁이 일어났다. 내몽골의 부족 단위들 중에서 49개 호쇼에서 35개 호쇼가 외몽골에 귀속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칭기즈칸 이래 600년 만에 모든 몽골족을 아우르는 거대한 국가가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몽골로 군대를 보내어 독립운동을 탄압하자 외몽골은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차하르 성을 점령하고 만리장성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1912년 4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이 비밀리에 체결한 중국에서의 세력 분할에 대해 합의를 하게 되면서 무산되었다. 러시아는 외몽골을 장악했고 일본은 내몽골을 각각 자신의 세력권으로 인정하기로 하였다. 또한 신생 중국은 몽골의 독립은 결코 승인할 수 없음을 고수하면서 내몽골을 러허 성과 차하르 성, 쑤이위안 성 등으로 분리시켰다. 수도인 니스렐 후레에서 열린 몽골과 러시아 양측 대표단의 회담에서 몽골 대표단은 자신들의 조국을 완전한 주권국으로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독립보다는 자치권을 얻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면서 거부하게 된다.
또한 몽골 정부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구미 열강 9개 국가에 승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모조리 거절당했다. 결국 몽골 정부는 300만 루블의 원조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내몽골에 주둔한 모든 몽골군을 외몽골로 철수시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러시아는 위안스카이 정부와 교섭하여 외몽골의 독립을 취소하고 자치국으로 격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는 외몽골과의 약속을 위반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목적은 몽골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외몽골에서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 5월 25일 러시아와 외몽골의 국경 마을인 캬흐타에서 체결된 러시아-중국-몽골 삼국 조약에서 몽골은 러시아의 압박으로 인해 이와 같은 제의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대신 몽골은 실질적인 중국의 내정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자체 정부와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뒤를 승계한 돤치루이(段棋瑞) 북양 정부는 몽골의 후견국가인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으로 몰락하여 적백내전의 혼란에 빠지게 되자 캬흐타 조약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1919년 11월 자신의 측근인 쉬수정(徐樹淨)을 서북주비사(西北籌備使)로 임명하고 600명의 군대를 니스렐 후레로 파견하였다. 당시 복잡한 중국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돤치루이는 몽골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여 반대파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생각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책략가였으며 강한 군벌인 쉬수정은 몽골 정부에 대해 자치권을 포기하고 투항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복드 칸과 각료들을 모두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하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중국군을 동원하여 복드 칸의 사원을 포위하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쉬수정의 군대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의 도움 없이 중국과 전면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복드 칸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다.
약 2,000여 명 정도였던 외몽골의 군대는 무장 해제된 상황에서 완전히 해산 당했다. 1919년 11월 22일 외몽골 정부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어 중국에 다시 복속되었다. 이 때 쉬수정은 화려한 해산식을 거행했다. 몽골 관료들의 관인은 모조리 회수 당했고 복드 칸은 중화민국 대총통인 쉬스창(徐世昌)의 사진에 머리를 숙이며 굴욕을 당해야 했다. 몽골인들에게는 최악의 굴욕이었지만 그로 인해 쉬수정은 중국인들로부터 서북왕(西北王)이라는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20년 7월 북경을 두고 북양 군벌 간의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 짧은 전쟁에서 돤치루이의 안휘파 군대는 우페이푸(吳佩孚)가 지휘하는 즈리(直隸)파 군대와 펑톈(奉天)군벌 장쭤린(張作霖)의 협공을 받아 4일 만에 완패하고 말았다. 몰락한 돤치루이는 톈진의 일본 조계로 도주했고 쉬수쟁 역시 외국 공사관에서 숨어 지내다 일본으로 망명했다.
쉬수쟁은 이후 손문과 동맹을 맺고 재기를 노렸지만 5년 뒤인 1925년 12월 즈리파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따라서 돤치루이를 대신해 즈리파와 펑톈파가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권력을 두고 분열되어 내전을 벌이는 등, 중국은 혼전의 연속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몽골에 대한 중국의 관심 또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지켜보면서 몽골 독립파들은 다시 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하게 되었다.
담딘 수흐바타르가 1920년 11월 허를러깅 처이발상과 함께 몽골 인민유격대를 조직, 운게른과 중국 군벌을 타도하겠다며 유목민들을 선동해 군세를 확장했고 정식으로 몽골 인민당을 창설하여 소련 볼셰비키 적군의 지원을 받아 3월에 캬흐타를 점령한 중국군 잔당을 소탕하고 6월 운게른의 군세를 격파하며 그를 후레에 몰아내고 독립에 성공한다. 현재도 은연 중에 중국이 몽골에 가하는 압박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몽골은 중국에 대한 불만이 매우 많은 상태이다. 중국 역시 옛날에 몽골에게 자주 약탈과 침공을 당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몽골에 대한 중국 항구 이용 문제에 있다. 몽골은 내륙국이기 때문에 자원을 수출하려면 어쩔 수 없이 타국의 항구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몽골과 가장 가까운 중국은 반중감정을 가진 몽골을 좋아하지 않아 몽골의 항구 이용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몽골에 우호적인 러시아도 하필 이미 극동 항구가 이미 포화 상태에 있어 쉽지 않다. 그래서 라진, 선봉 등 북한의 항구를 개발하려고 공을 들이고 있다.
몽골은 국토가 상당히 척박하여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식량의 양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중국이 이를 악용해 몽골을 압박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 사실 과거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생긴 이유 역시 만리장성 이북은 농업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토지와 기후를 가진 쓸모 없는 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넘어선 중국에 과하게 의존적인 경제 문제 또한 존재하고 있다.
특히 몽골의 무역 상대 국가들을 보면 몽골 수입의 39.9%, 수출의 84%를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홍콩에서 항구를 쓰도록 빌려주고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화물기 및 중국을 종단하는 국제 화물철로로 운송되고 있어 중국이 이를 막는다면 몽골은 치명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칭기즈칸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역사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중화민국 시절 청나라 때 영토를 중국이 계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몽골도 자국 영토로 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몽골인들 중 일반인들은 중국에 대해 매우 극혐하고 있다. 일단 중국인이 몽골 길거리에 모이면 시비부터 걸고 있다. 몽골인들이 한국어로 말 걸다가 한국어로 대답하면 반가워하고 한국어를 못 알아들으면 그 사람을 중국인으로 여기고 시비걸며 주먹 날리는 경우가 많다. 몽골의 반중 감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인이다 여기면 일단 두들겨 패고 생각하자는 우스갯 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 반중감정의 이면에는 복드 칸 시대 중화민국 대총통인 쉬스창(徐世昌)의 사진에 머리를 숙이며 굴욕을 당해야 했던 역사의 치욕이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데다 칭기즈칸도 중국인이라며 역사 공정을 하는 중국인에 대한 강한 거부감 때문이다. 몽골의 반중감정에 비해 우리 한국의 반중감정은 매우 점잖은 편이다. 이 또한 역사적인 DNA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몽골은 중국에 저항해 온 역사가 길지만 우리는 중국에 사대한 역사가 길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