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루주는 1951년에 탄생한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 무장단체로써 1980년대에 대한민국 언론이나 교과서를 통해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는 프랑스어 표기이며 현지 크메르어로는 크마에 끄라함(ខ្មែរក្រហម / Khmêr Krâhâm)이라 불리는데 두 명칭 모두 “붉은 크메르”라는 뜻을 갖고 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라는 국가를 세워 지배하였으나 국가를 지배하면서 비인간적인 수뇌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행한 것에 이어 나라를 초토화시켜 현재까지도 캄보디아 인들에게 이어지는 막대한 심리적이 고통과 후유증을 안겨 주었다.
이들은 매우 극단적이었던 데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평가가 최악이다. 이들을 두고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골 성향의 무리들로 취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오히려 크메르 루주를 지원한 미국의 헨리 키신저 방식의 정치 현실주의 외교 정책을 비판할 때, 크메르 루주의 잘못된 부분들을 사례로 언급하기도 한다. 크메르 루주의 단체명은 원래 1960년대 시아누크 국왕이 캄푸치아 공산당이나 공산당 지지자들을 지칭할 때 쓰인 호칭이었다. 이들은 북베트남의 지원으로 탄생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 세력을 확대하여 농촌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사실 붉은 크메르가 세력을 확장하고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크다.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미군은 베트콩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에도 폭격을 가했으며 친미 우익 세력의 쿠데타를 획책했다. 미군은 캄보디아에 베트콩들이 다수 주둔해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23만 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캄보디아는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 발발 이후 미국과 단교하였고 1966년에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내 기지를 설치하고 시아누크빌로 물자를 보급 받을 수 있도록 중국과 협정을 체결하는 등 친 북베트남 외교 정책을 펼치게 된다. 물론 베트콩 게릴라들은 보급이나 기습 용도로 구찌 땅굴을 이용했는데 이 땅굴은 베트남은 물론 인접한 캄보디아나 라오스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이 베트콩의 땅굴에 미친 영향은 극히 미미하였고, 오히려 그 폭격에 죽은 민간인만 최소 5만 명에서 최대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1960년대 캄보디아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의회를 장악하며 사실상의 독재 정치를 펼쳤다.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 성장이 침체하기 시작하면서 시아누크에 대한 반발이 조금씩 늘어나 이념 대립도 심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0년 우익 쿠데타가 발생해 론 놀에 의한 친미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론 놀 정권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모른척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였고, 경제 정책에서도 무능했으며 특히 당시 군부 또한 학살에 가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캄보디아 내에서 반미 정서가 팽배해지면 오히려 불리하게 되었다.
결국 시아누크가 크메르 루주와 동맹을 맺으며 지지 기반을 급속히 늘릴 수 있었고 결국 1975년에 론 놀 정권을 붕괴시키고 1975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이 성립되었다. 처음에는 시아누크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민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각종 이상한 정책으로 인해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자 반발이 일기 시작했는데 크메르 루주는 이러한 반발을 킬링필드라는 참혹한 대학살로 제압했다. 이후 베트남에게 함락당한 옛 영토들을 회복하겠다며 베트남과 국경분쟁을 벌이며 충돌하다가 베트남군과 베트남을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 동맹군의 공격으로 인해 정권이 붕괴하고 말았다.
1979년 민주 캄푸치아 정권은 베트남군의 침공을 받아 붕괴되었지만 폴 포트와 키우 삼판(Khieu Samphan) 등이 권력을 잃고 몰락한 크메르 루주 세력은 국제 사회와 서방 세계로부터 합법적인 정권의 지위를 잃지 않은 채 잔존하여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건국한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부군과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상대로 게릴라전과 각종 테러를 벌이며 전쟁을 이어갔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은 옛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권역을 베트남이 지배하려는 시발점으로 여겨졌으며 더 나아가 태국까지 병합하여 베트남 제국을 건설하려는 베트남 팽창주의의 야욕으로 간주되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군과 마주하게 된 태국은 물론 베트남에게 원한이 있는 중국과 미국이 모두 반발하였으며 싱가포르, 호주 등 공산주의 확산에 경계심을 세우고 있던 동남아시아-오세아니아 국가들까지 가세하였다.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은 크메르 루주에 대한 지원을 주장하였고 크메르 루주의 폭정들을 인지하고 있던 미국은 크메르 루주가 아닌 제3의 세력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ASEAN은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당연히 이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1981년에 ASEAN은 크메르 루주 무장 해제 요구를 포기하게 된다.
결국 양자의 주장을 절충하여 망명 중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데려와 국가 주석으로 옹립하고 민족주의자인 손 산을 수상으로, 크메르 루주의 키우 삼판을 외교부장으로 하는 민주 캄푸치아 연합 정부가 1982년 6월 22일에 수립되어 반 베트남의 기치 아래 모인 미국, 중국, 태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반면 소련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하며 매년 무려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막대한 지원을 해 주었는데 이는 미국이 태국에 제공하는 연간 3천만 달러의 지원을 크게 상회하는 규모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베트남군을 무장시킬 수 있는 각종 장비들과 MiG-23을 비롯한 전투기와 해군 함정,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 주둔 비용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개입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다른 이웃 국가인 라오스는 원칙적으로 이 전쟁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는데 라오스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국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쑤파누봉 정부가 선택한 일이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쑤파누봉과 까이쏜 폼위한(Kaysone Phomvihane)과 같은 라오스의 집권 공산주의 세력인 파테트라오의 고위층 인사들이 보기에도 크메르 루주가 언급하는 주장들은 도저히 공산주의라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오스는 공산 세력인 크메르 루주가 내전을 치르며 정권을 장악한 캄보디아와 같이 내전에서 옛 정권이 패망하고 공산당 반정 게릴라 세력인 파테트라오, 현 라오 인민혁명당이 정권을 잡고 있긴 했지만 왕정에서 공산주의 정권으로의 이양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된 사례였고 거기에 라오스는 왕당파, 공화주의 우파, 공산주의 좌파 등 주요 세력의 수장 모두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자들인 것을 넘어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 관계였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를 보면 형제라고 숙청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라오스에서는 왕자 출신의 좌파 지도자이자 집권 여당인 파테트 라오의 최고 수장이던 쑤파누봉이 1975년 공산 정권 수립 이후에 초대 국가 주석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고도 다른 정파를 주도하던 이복 형제들에 대한 숙청이나 사형 없이 온건한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다. 결국 이로 인해 라오스 국민들 사이에는 킬링필드 등과 같은 잔혹한 대학살을 벌이며 공산화가 이루어지던 당시 캄보디아의 모습을 상당히 무시하거나 살인과 보복에 미친 정권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1989년 베트남의 철수 이후 캄보디아 왕국이 창설되었을 때 손 산의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KPNLF), 시아누크 전 국왕의 민족통일전선(FUNCINPEC)과 같이 참여하여 새로운 정권 구성을 논의했고 1991년 UN 중재로 인해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크메르 루주는 이 협상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6년 평화 협상이 체결되면서 크메르 루주에 속했던 이들이 대부분 캄보디아에 귀순하고 1999년 이들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이들에 대한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21세기에 들어 UN의 지원 하에 캄보디아 전범재판소가 설립되고 근 30년 만에 학살에 가담한 크메르 루주 인사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때는 크메르 루주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던 폴 포트가 사망한 이후였다.
물론 단순히 크메르 루주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잔혹한 처벌을 벌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연좌제가 배제되고 일반 가담자가 아닌 대형 범죄에 책임이 있는 고위 지도자 위주로 기소가 이루어졌다. 사실 크메르 루주에 속했다가 회개한 이들은 많다. 크메르 루주가 지배할 때 살아남기 위해 크메르 루주에 가입하여 학살에 앞장서거나 동원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인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의 범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피해자들을 찾아가 사죄하고 용서를 받은 뒤 머리를 밀고 승려가 된 전직 크메르 루주 간부들도 많았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찾아가 발을 씻겨 주면서 용서를 빌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남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자신이 씻겨준 자의 머슴이 되어 당신을 대접한다는 뜻과 모든 진심을 다하여 사죄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장 첫 번째로 재판이 이루어진 것은 주된 학살이 이루어졌던 S-21 교도소 소장이며 1급 고문자였던 깡 겍 이우(Kaing Guek eav 또는 lew. 1942~2020)로 일명 둑 / 두치(Duch) 동지였다.
20만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는데 공식적인 사망자는 17,000명이지만 정황 증거와 수감자들의 증언을 보면 그 몇 배는 더 된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의 집권 시절 교도소 소장이 직접적으로 고문을 전문으로 하는 경우는 이곳이 유일했다고 한다. 정신 무장이란 이름으로 대변을 먹게 하거나 아이들을 죽이게 하는 명령을 내리는 등 아주 충격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깡 껙 이우 소장은 2020년 9월 2일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익명의 제보자에 의하면 그는 수년 동안 폐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깡 껙 이우는 19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인해 크메르 루주 정부가 붕괴되자 신분을 숨기고 도주하여 한적한 곳에서 숨어 살다가 1995년 그를 알아본 이들에게 공격 받아 아내가 죽게 되었으며 또 다시 도주했다. 그는 개신교 목사가 되어 교회를 건설하고 선교하다가 그를 알아 본 현직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형사는 당시 두치에게 잡혀 고문 받았던 수용소 수용자였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었다.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그 악마가 웃으면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걸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잊혀 지지도 않는다고 치를 떨며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1999년에 구속되었으며 상소가 기각되어 2009년 2월에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2010년 징역 35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항소했으나 유엔 전쟁 범죄 법정은 2012년 항소를 기각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태도는 재판 당시 캄보디아 여론을 격분시켰다. 지난 10년간 회개했다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모습을 취하다가 정작 재판에서는 자신이 억울하다며 하나님의 힘으로 회개했으니 용서를 원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목사인 자신을 외면하는 지에 대해 교회들을 원망하는 언사까지 하여 재판에서 야유를 받았다.
더불어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죄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발언했다. 이는 자신은 상부의 지시를 받은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 중간 관리자에 불과한 자신이 먼저 처벌받아야 하는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 재판과 관련한 자료인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 기사를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현장을 보던 두치의 죄과를 모른 상태에서 그를 목사로 추천하던 인물인 랑 뚜야우 페르난데스(Lang Tuyau Fernandez) 목사는 한숨을 쉬었다. 깡 겍 이우를 옹호하려던 모든 마음이 사라지고 말없이 쳐다봤을 뿐이었다. 바로 그도 크메르 루주에게 형과 아버지를 잃었고 시체도 찾지 못했으며 그 또한 어릴 적에 수용소에서 맞아 남은 상처가 몸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과거를 뉘우치는 말이라도 했더라면 그를 용서했을지 모를 것 이지만 깡 겍 이우 홀로 종교적으로 회개했다는 말에 그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목사가 아니라면 가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깡 겍 이우를 체포한 형사의 어머니도 크메르 루주 대원에게 많은 고문을 당해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그 대원도 승려가 되어 나중에 찾아와 어머니의 발을 씻으며 용서를 빌었고 어머니는 그를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그 형사도 어머니가 용서하고 자신도 용서한다고 했지만 이러한 것과 대조적인 두치의 저와 같은 발언을 보면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고 화를 냈다. 이와 관련한 서적으로 당시 재판을 지켜보았던 프랑스 언론인 티에르 크루벨리에(Tières Crubellier)가 2012년에 저술한 <자백의 대가(La confession)>가 있는데 이는 다소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있다. 이 서적에서 프랑스였으면 다르게 처리했을 것이라는 형식의 내용이라든지,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식민 지배했던 과거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이며 후진국 캄보디아에 대해 대단한 인종차별적인 서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재판에 대해 매우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후에도 전범 재판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크메르 루주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Nuon Chea) 전 캄푸치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비서 겸 인민 대표 회의 상설 회의 의장, 이엥 사리 전 외교부장, 키우 삼판 전 국가 상임위원회 주석, 이엥 티릿(Ieng Thirith) 전 사회 문제 부장 등의 재판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킬링필드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학살 사실을 부인하거나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키우 삼판은 1988년까지 학살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하였으며 그는 정책 결정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법부 측이 자신을 공정하게 재판할 능력이 없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민주 캄푸치아의 정책은 키우 삼판의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혐의는 매우 농후했다.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을 시기에 캄보디아에서 진정한 사회 혁명을 이룩하려면 나라 전체를 교육, 산업, 도시, 화폐가 없는 완전한 농업 경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 킬링필드의 이론적인 기반이 되었다.
게다가 훈 센이 이끄는 캄보디아 정부 또한 이번 재판이 마지막 전범 재판이라는 태도로 매우 비협조적인 상태로 나왔으며 2022년이 되어서야 재판이 종결되었다. 실제로 재판에 회부된 전범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70~80세를 넘은 고령이었던 데다 이엥 사리처럼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노환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었고 이엥 티릿처럼 알츠하이머병이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종신형을 선고 받은 누온 체아와 깡 겍 이우는 이미 옥사했으며 2022년 9월 22일에 종신형이 확정된 키우 삼판 정도만이 크메르 루주 최고위층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 중에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들을 그리워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훈 센이 장기 독재로 들어서며 2023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면서 아들 훈 마넷(Hun Manet)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독재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많고 캄보디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산악 지대의 소수민족 대우를 크게 개선시켰기 때문에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소수 민족 사이에서도 시간이 지나며 세대가 바뀌어 감에 따라 그와 같은 여론은 줄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