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모더니즘은 이슬람(Islam)과 모더니즘(Modernism)이 결합된 이념을 말한다. 이러한 이슬람 모더니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랍권에서는 이집트 알아즈하르 대학교의 셰이크였던 무함마드 압두(Muhammad Abduh, 1849~1905)가 창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자디드 운동이라고 하여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세속적인 학문과 보수적인 이슬람 학문을 융합하는 형태로 비슷한 시기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 압두(Muhammad Abduh, 1849~1905)는 쿠르드족 아버지와 이집트 아랍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압두의 사상은 중세 이후 수니파에서 이단으로 몰려 사멸된 무타질라 학파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을 중점으로 했다. 압두는 근대 시대 당시 서구 세력이 이슬람권을 한참 앞선 이유를 두고 이를 비교 분석했다. 그는 중세 이슬람권에서는 사변철학이 발전했지만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사변철학이 주류 학계에서 완전히 사멸하게 되었다. 반대로 중세 기독교계는 철학과 과학이 신학에 눌려있었으나 근세 들어서 철학이 신학을 압도한 이후 빠르게 발전을 이루었다.

압두는 주류 순니파에서 사멸되었던 무타질라 학파를 복구시켜야만 이슬람권의 신속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 모더니즘은 역사적으로 이슬람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근대화 이념이라 볼 수 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슬람권의 근대화 및 현대화를 주도했던 이념으로도 알려져 있다. 19세기 중엽에 그들 스스로를 살라피야(سلفي)라고 칭했는데 이는 20세기 후반에 생긴 이슬람 근본주의 방식의 살라프파가 아니라 전근대 당시 이슬람의 전통을 준수하면서 이슬람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의 변화를 수용하고 서양과 타협해야 한다는 사상을 지칭한다.
서양은 당시 프랑스 대혁명과 경제적으로 산업혁명 등의 여파가 강해지면서 카톨릭의 권위가 추락하고 모더니즘이 득세하게 된다. 서유럽 국가들의 인구와 자본, 국력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18~19세기 들어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인도의 무굴 제국은 국력이 갈수록 쇠퇴하고 심지어는 문맹률까지 점점 늘어나는 등, 오히려 서양에 뒤쳐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명의 차이를 체감한 이집트와 무굴 제국의 일부 무슬림들은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수용하여 이슬람 사회도 서양처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에는 서구 열강의 서아시아 및 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탈이 가속화 되면서 진보적인 무슬림 지식인들은 이슬람 사회 역시 서양처럼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서양의 침략에 맞서 자신들의 강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약화된 중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서의 이슬람 현대주의 운동은 인도나 아랍권의 모더니즘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직접적인 식민지 상태로 인종 차별및 경제적인 착취로 인해 거의 궁핍하다시피한 인도나 이집트, 이란과 달리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속해 있는 타타르 무슬림들은 러시아에서 군복무와 통상을 통해 전통적으로 사회적 입지가 높은 편에 속했다. 따라서 타타르의 지식인들은 러시아가 서구로부터 유입한 학문과 기술을 이슬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이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족과, 위구르족, 우즈베크족 등에게 다시 전파하는 일을 주도하게 된다.물론 근대 시대 이전의 카자흐족과 위구르족, 우즈베크족들은 명목상 무슬림이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텡그리 신앙과 같은 샤머니즘의 영향이 더욱 강했다.
타타르족 상인들이 카자흐족과 접촉하면서 이슬람 문화가 본격적으로 카자흐족에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세기 초부터 오늘날 타타르스탄의 카잔 대학은 러시아 문화를 타타르족과 카자흐족에게 전파하며 그와 동시에 이슬람 문화도 함께 뿌리를 박은 중심지나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교육 정책을 크게 강화했다. 카잔 출신의 이슬람 율법학자인 니콜라이 알민스키(Николай Альминский)는 카잔 지역과 볼가 일대에 학교들을 추가로 설립하고 타타르인 교사들을 채용하여 타타르어로 러시아식이나 유럽식 교육을 하게 했다.
이와 같은 서구식 교육의 확대는 볼가 지역 대다수의 타타르족들로부터 저항이 아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카잔 대학에서 교육 받은 무슬림들은 러시아 문화에 상당한 수준으로 동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투르크와 무슬림 문화 유산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많은 볼가 타타르족들이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영토 각지에 가서 자디드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위구르족도 마찬가지로 타타르족 출신의 교사들이 동투르키스탄 지역으로 가서 청나라 말기의 위구르인들이 제국주의적인 압제에 맞설 수 있도록 민족주의 교육 및 위구르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처럼 전근대적인 이슬람 교육의 상징인 마드라사에서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된 교재를 반복하여 암기하는 것이 교육의 주안점이었지만 동투르키스탄의 전통적인 마드라사들은 따로 글씨를 필사하는 법은 배워도 작문을 직접 가르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시기에 동투르키스탄을 재점령했던 한족 군벌 정권들은 한어를 가르치는 서당을 신강성 각지에 설치하여 위구르족들에게 강제로 유교 경전을 암기시켰다.
이와 같은 무성의한 교육 시스템과 교사들의 낮은 수준으로 인해 서당을 졸업한 학생들은 한자 몇 개만 겨우 쓰는 수준에 불과했고 일부 위구르족 학생들에게 강제로 위구르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차단하여 부모와 학생들이 서로 의사 소통도 못하게 되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타타르족들이 동투르키스탄에 새롭게 세운 이슬람 현대주의 자디드 학교들은 위구르족 학생들에게 서구식으로 과학, 수학, 역사, 문학, 체육 등을 포괄한 종합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이어 이슬람 역시 교과 과목에 포함시켜 위구르족 일반인들의 큰 호응을 얻게 되었고, 위구르어 문법과 작문은 물론 현지 상황에 맞게 중국어 교과 과목도 추가하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교재는 타타르어에서 위구르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교과서의 수준도 월등히 우수한 편에 속했다. 이로 인해 이슬람 현대주의에 입각한 자디드 학교들은 위구르족 가정에서 선호도가 월등히 높은 상태였으며, 이와 같이 교육받은 학생들은 훗날 동투르키스탄 제1 공화국을 주도하는 인재들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붕괴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세워지면서 공산당에 의해 자디드 운동은 쇠퇴하는 듯 보였다. 소련은 중앙아시아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소련 내 여타 지역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대중 교육을 실시하게 함으로서 교육적인 면에있어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자디드 운동가들이 세워 놓은 토대가 없었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창기 소련 정권은 이슬람 자체를 소련에서 일소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디드 운동가들로 인해 적당한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살아 남았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와 타협한 결과 소련 내 무슬림 거주지역의 교육 투자와 그 성과만큼은 포르투갈,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 지역보다 월등했다. 1930년대에는 초등 교육이 의무화 되었으며 10세에서 30세 사이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문맹을 퇴치하는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당시는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무슬림 식민지에서 초등학교 취학률이 6% 정도에 이르렀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소련의 무슬림 지식인들은 언어와 문학의 근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26년 소련 정권은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랍 문자 사용을 금지하는 대신 자디드 운동가들과 타협 하에 터키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라틴 문자를 사용하도록 지침을 변경하게 된다. 1938년 이후로 스탈린 정권의 러시아인 동화 정책이 추진되며 러시아어가 의무 과목이 되긴 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부족주의와 지역 감정이 어느 정도 극복되고 언어(우즈베크어, 아제르바이잔어, 카자흐어, 타지크어, 키르기스어, 투르크멘어, 바시키르어 등등)에 기반한 민족 정체성들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 볼셰비키의 숙청 하에서 살아 남은 자디드 운동가들은 무슬림 소수 민족 고유의 역사, 언어, 구전문학, 서사시, 미술을 재발견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따라서 스탈린 사후에는 다양한 민족 문화가 부활되거나 재창조되었다.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무슬림들의 구전문학과 서사시는 계속 보존되었으며 현대 문학의 형태로 재해석이 이루어졌다. 흐루시초프 시대 이후 다양한 민족 언어로 된 잡지와 신문이 출간되었던 것이 대표적으로 이는 어문학적,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면서 중앙아시아 내 여러 민족들의 역사관과 민족주의가 현대적으로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