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2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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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위파(Alawites)는 시리아에서 주류 이슬람 분파는 아니지만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내부 권력을 장악한 뒤, 시리아에서만큼은 주류가 되었다. 알라위파는 시아파 12이맘파의 10대 이맘 알리 알 하디의 사후 그의 측근이던 이븐 누사이르(ابن نصير)가 후계자를 자처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12이맘은 시아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메시아적 사상"을 갖고 있다. 수니파에서는 이러한 사상 자체가 전무한다. 애초부터 선거로 칼리프를 뽑는 것에 찬성했으니 혈통적인 부분은 그다지 중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파에게 있어 "메시아적 사상"은 필연이다. 시아파에서는 예언자의 영적 지위와 기능을 알리(Ali)와 그의 혈통에서 비롯된 11명의 후손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신의 화신과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임무도 표면적으로는 기적으로 보인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최후의 11번째 이맘은 그 스스로 복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한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런데 12번째 이맘은 873년 무함마드(Muhammad)라는 인물로 그가 4세 때 마흐디의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마흐디의 집 지하 저장소로 사라졌다고 한다.


화면 캡처 2025-04-28 222353.png
사진 : 시리아 알라위파, 사진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시아파들은 제12대 이맘은 살아있고 언젠가 마흐디(Mahdi)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마흐디(Mahdi)는 시아파에서 세상을 구할 인물인 구세주이며 메시아이자 세상을 심판할 심판자로써의 임무를 갖고 있다 믿는다. 그래서 시아파들은 마흐디가 세상이 끝나기 직전에 나타날 것이라 하였다.  시아파에서는 제12대 이맘 즉 “숨은 이맘(Hidden Imam)”이 예배를 듣고 이 세상의 일을 중재한다고 믿는다. 지금도 이란의 주류가 되어 있는 시아파는 12이맘파가 주류가 되어 이끌고 있다. 반대로 알라위파(Alawites)는 이븐 누사이르를 10대 이맘의 지명을 받아 그를 칼리프로 내세웠기에 12이맘파의 배척을 받았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12이맘이 아니라 10이맘파라 하여 10명의 혈통적 이맘만을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12이맘파에서 빠져 나온 이븐 누사이르는 사실상 알라위파의 창시자라 볼 수 있으며 알라위파를 경멸하는 여타 무슬림들에게서 '누사이르 파'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알라위파의 창시자인 이븐 누사이르를 우상으로 숭배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라위파는 시아파에서 분파한 것은 맞지만 이러한 종파 분리로 인해, 시리아 내전 당시 이란 측의 미적지근한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결과가 되기도 한다. 


알라위파는 주류 시아파에서 분파하여 이븐 누사이르에게서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1,000년을 넘게 동부 지중해 지역의 소수종파였지만 다른 종파들이 흡수되고 사라짐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던 종파였다. 알라위는 기독교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이슬람 사변철학, 시아파 극단주의 및 암살단파 등의 영향을 받은 매우 복잡 다단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라가 아닌 이븐 누사이르를 숭배한다는 종교적 오해 아닌 오해로 인해 차별과 탄압을 받았고 그로 인해 빈곤에 시달려 수백년 넘게 고생했다. 이들의 교리 또한 상당수가 사라지고 변형되어 왔는데 이미 13세기에 들어 주류 이슬람에서는 알라위가 불신자와 다름없는 이단 취급을 받았던 신세였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 십자군들조차도 처음에는 이들을 살해하고 박해했으나 이후에는 이들이 수니파 무슬림들뿐 아니라 시아파 무슬림들과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자 이슬람 세계를 파멸시킬 전략으로 알라위를 포섭하여 분열시킬 요소로 이용했다고 한다. 이후 몽골 제국이 레반트 일대를 침략하자 알라위파들은 몽골군을 맞아들여 자신들을 배척하고 박해한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수니파의 유명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ابن تيمية)는 알라위파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들에 대한 연구를 감행했다. 타이미아는 알라위파를 두고 카르마트파나 바티니야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보다 더한 불신자들이라 혹평했다. 대다수의 무슈리킨(Mushrikīn, 성서의 백성들이 아닌 다신론자들)보다도 더한 불신자들이며, 이들이 무함마드의 공동체에 끼친 해악은 무슬림과 전쟁 중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이 미치는 해악보다 더 크다고 하였다. 이들은 무지한 무슬림들 앞에서 자신들이 아흘룰 바이트(Ahl al Bayt, 예언자의 가문 사람들, 즉 딸 파티마와 사위 알리의 자손들)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하나님도 믿지 않고 예언자도 믿지 않으며, 성서도, 하나님의 명령도, 금기도, 보상도, 벌도, 천국도, 지옥불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 대신 알라위들은 하나님과 예언자가 남긴 말을 무슬림 학자들에게 알려져 있는 그대로 가져다 듣는다고 했다. 또한 그 말씀들을 자의적으로 가공하고 해석하면서, 그들의 해석이 ‘숨겨진 지식(ilm al-bātin)’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의 거짓됨에는 끝이 없으며 이들의 목적은 이슬람 신앙과 법을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부인하는 것이고 그 문제들에 그들만이 알고 있는 현실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타이미야의 비난은 매우 호전적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수니파 무슬림들이 알라위 공동체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전쟁을 하게 된다면 알라 하나님께서 흡족해 할 것이라는 파트와(فتوى:  교령)를 발표할 정도였다. 타이미야가 살아 있던 14세기 당시 알라위의 교리는 인간이 사후에 영혼도 같이 죽으며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교리가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아 변형되기도 하면서 현재 알라위들은 인간이 죽고 나면 영혼이 죽지 않고 환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븐 타이미야는 레바논 산악 지대에서 알라위파를 토벌하는 작전에 맘루크 정권과 의견을 같이 하여 두 세차례 직접 참전했다. 그 결과로 인해 레바논의 알라위파 상당수는 수니파와 맘루크 정권의 박해를 피해 수니파 대신 비교적 교리가 비슷한 시아 12이맘파로 다시 들어갔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분석한 서적 중 시리아 친알라위파 입장에서 서술된 책들은 이븐 타이미야를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며 상당히 부정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맘루크 왕조는 알라위파 무슬림들이 몽골 제국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에게 돌아선 알라위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박해했다. 


특히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궤멸적 참패를 당하자 보호막이 없어진 알라위파는 박해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맘루크들은 무자비한 군인들이었고 수니파로 개종을 거부하는 알라위파들은 몰살시키려고 시도했다. 알라위파들은 체포되어 투옥당하거나 공개 광장에서 채찍형이나 심지어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이들은 당시 정체를 숨기고 은거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대가 되면서 알라위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지만 그동안 박해로 인해 많은 수가 줄어 소수에 불과한 데다 이단 취급 받는 것은 여전했고 세력도 미미하다시피한 알라위파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러나 비슷하게 이단으로 취급을 받았던 드루이즈는 적어도 레바논 아미르 국에서 대대로 제후를 배출하여 세를 넓히는 바람에 지배 계층 자리에 있었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다. 이에 비해 알라위는 매우 처지가 열악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알라위파 신자들의 숫자는 공식적으로는 10만 명 정도로 소수인 데다 대부분 경제력 없는 농노들이었으며 관료로 배출되는 이가 없다보니 대부분 수니파 지주들에게 착취와 탄압을 받았다. 


이에 자연스럽게 생활도 낙후되고 열악해졌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에는 1907년에 전기가 보급되었는데도 시골의 알라위파 거주지에는 1940년대 후반까지도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생계 유지를 위해 오스만 제국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는 알라위파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공공연하게 진급에서 차별을 받았고 임금에서도 차별을 겪었다. 나아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알라위파들을 사실상 선봉에 세워 총알받이의 목적으로 빈약한 무장에 무조건 진격을 시도하게 하여 최전방으로 내몰았다. 교육 수준도 매우 처참하여 시리아 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의 부친이자 전 대통령인 하페즈 알 아사드 또한 알라위파로 자신의 고향에서 유일하게 고등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다.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지고 터키 공화국이 들어섰으며 오스만의 영토였던 시리아에 프랑스가 들어왔다. 프랑스는 알라위파를 이교도 취급하던 수니파 주류 이슬람과 다르게 알라위파 역시 종파만 다른 무슬림으로 인정해주었으며 알라위파에게 양질의 일자리와 프랑스 위임통치령으로 있던 1941년까지 프랑스 식민정부로부터 보호 받는 알라위파 자치령을 할당해 주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프랑스가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프랑스로 인해 수니파의 오랜 정치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알라위파는 프랑스 식민정부의 도움으로 얻은 일자리를 토대로 경제력을 획득해 서서히 수니파들의 농노 신세에서 해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라위파는 프랑스에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에 출세를 위해 대규모로 입대했다. 물론 주류 수니파들은 프랑스 식민 통치에 협조하고 있다며 앙심을 품었다. 그러나 알라위파들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는 매우 고마운 존재였고 자신들을 탄압하던 수니파를 매우 증오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20세기 초중반 이후부터 알라위파는 급격히 서구화 되기 시작했는데 서구적인 사상들과 군인 출신 알라위파들에게서 군사적인 전통이 알라위파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았고 군대를 통해 프랑스의 식민 통치 이후에도 도태되지 않고 시리아 내 '군부의 실세'라는 시리아 바트당 정권의 필수적인 존재로 급부상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60년대에는 시리아의 장교단 대부분이 알라위파였을 정도로 성장했기에 이전의 지배자였던 수니파들은 더 이상 알라위파를 건드리지 못했다. 사실상 프랑스가 시리아에서 알라위파를 키워준 셈이다.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 당시 고등판무관이었던 앙리 드 주베넬(Henri de Jouvenel)은 한 알라위 정치 지도자와 대화를 나눈 바 있었는데 해당 지도자는 알라위파가 과거 3-400년 동안 핍박을 받다가 이렇게 대우를 받다 보니 3~4년 안에 훨씬 더 많이 발전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대로 놓아두면 분명 시리아의 주류가 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1953년까지 알라위파는 시리아 의회에 지정된 정당 의석이 존재했다. 그러나 종파주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인해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로만 인구 조사 형식으로 나눈다 포고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서 1970년에 군부 출신이자 알라위파인 하페즈 알 아사드가 정권을 쟁취한 이래 알라위파는 마침내 시리아의 주류가 되었다. 알라위파 입장에서 볼 때 1,000년이 넘게 탄압을 받아 소수종파로 전락하면서 생존을 걱정했었지만 20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드디어 기득권 주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알라위파 정권은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로 이어져 2024년까지 늦게서야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러한 알라위파는 주위의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해 수니파 원리주의를 추구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된다.


알라위파는 이들에게 테러와 각종 반란 시도에 직면하면서 또 다른 고충에 시달리게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시리아 내 발생하고 있던 각종 지역 감정들과 알라위라는 이교도 정권에 침탈된 시리아를 다시 수니파에게 되돌리자는 목적을 내세워 계속 반란을 일으켰고 알라위파 요인들과 친알라위 수니파에 대한 암살 및 테러를 시도하게 된다. 당시 대통령인 하페즈 알 아사드는 이와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와 봉기 시도에 하마 학살(Hama massacre)과 같은 강경정책으로 대처했으며 동시에 1974년부터 레바논과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로부터 알라위파가 시아파의 일원이라는 해석을 받아내면서 마침내 정식 시아파로 인정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페즈 알 아사드는 반시오니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기독교, 수니파, 시아파 국민들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한편으로 수니파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수니파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을 가급적 자제했으며 정부 공무원 할당에 친정부 성향을 가진 수니파들을 대거 기용하였으며,  수니파식 예배를 하는 등 1,000년 이상 대립해온 수니파와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어 기독교와 드루이즈 등 다른 시리아 내 소수 종파에게도 함께 이스라엘에 맞서 동맹을 맺고 이들을 존중해주고 공존하는 정책을 폈다. 


이처럼 하페즈 알 아사드는 세속주의와 결합한 정책으로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함과 동시에 시리아의 다종교 공존을 꾀했다. 그러나 알라위에 대항하고자 하는 근본주의 세력들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하페즈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존재하던 2015년 4월, 징집 연령인 알라위파 청년 25만 명 중 ⅓이 시리아 내전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알라위파를 모두 죽이려하는 ISIS나 점령지에서 알라위파를 학살한 혐의가 있는 알 누스라 전선 계열 반군들 및 알 카에다 세력들, 이러한 극단주의자들의 준동을 제대로 통제조차 못 하는 자유 시리아 군은 무능력한 상태라 알라위파 입장에서는 항상 불안을 달고 살아야 했다. 시리아 내전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고 알라위파와 기독교 세력 등 소수 종파들이 아사드 정권과 함께 반군과 맞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을 보면 알라위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불안하고 잔인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사드 부자의 집권기는 1,000년이 넘는 알라위파의 역사에서 늦게나마 맞이한 최전성기 시절이었고 바샤르 알 아사드가 권좌에서 축출된 현재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의 매우 잔인한 보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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