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대정전, 문명이 멈춘 날…스페인·포르투갈 블랙아웃 사태 전말
2025년 4월, 이베리아반도에 덮친 정전 대혼란…기후변화와 전력망 불안정이 부른 위기
문명의 불빛이 꺼진 날 – 대정전이 던지는 지구적 경고
이베리아반도의 암흑 18시간
2025년 4월 28일 정오, 전력으로 연결된 현대 문명의 뼈대가 이베리아반도에서 붕괴됐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은 약 18시간 동안 양국을 암흑과 정적 속에 가두며, 21세기 문명이 얼마나 전기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열차는 중간에 멈춰 승객을 가두고, 공항은 이착륙을 멈췄으며, 도시의 신호등과 결제망은 무력화됐다. 일순간 모든 것은 멈췄고, 사람들은 스마트폰 불빛에 의존해 길을 찾고 마트에서는 현금으로 물건을 구매했다.
마드리드의 한 주민은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여름에 정전이 발생하는 건 익숙하지만, 한 국가 전체가 암흑에 빠지는 건 처음 경험했다"고 증언했다. 바르셀로나의 관광객들은 호텔 로비에 모여 촛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웠으며, 리스본의 간선도로는 신호등이 꺼진 채 시민들의 자발적 교통정리로 겨우 혼잡을 피할 수 있었다.

초국가적 전력망의 취약성 직면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초기 분석에 따르면 스페인 내륙에서 급격한 기온 변화로 인해 초고압 전력선에 '유도 대기 진동(induced atmospheric vibration)'이라는 드문 현상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유럽 각국이 공유하는 전력망 간 동기화가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5기가와트(GW), 스페인 하루 전력 수요의 60%에 해당하는 막대한 전력이 5초 만에 사라지며, 전력 공급 체계 전체가 무너진 것이다. 일부에서는 사이버 공격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현재까지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럽전력협회(ENTSO-E)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사태는 기후변화로 인한 극단적 기상 현상이 전력 인프라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카스티야 지방의 기온이 단 30분 만에 15도 이상 급변하면서 고압 전력선에 비정상적 진동이 발생했고, 이 진동이 연쇄적으로 확산되며 시스템 붕괴로 이어졌다. 특히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진 유럽전력망에서 이러한 급격한 변동은 기존 송배전 인프라로 충분히 대응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드러냈다.
대규모 피해와 사회적 혼란
피해 규모는 상상 이상이다. 약 5800만 명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4명이 사망했고, 경제적 손실은 최대 45억 유로, 우리 돈으로 약 7조3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마드리드에선 정전 중 촛불 화재로 사망자가 발생했고, 갈리시아 지방에서는 발전기 사용 중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가족 3명이 숨지는 비극이 벌어졌다. 통신망과 금융시스템의 마비는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고, 마트와 주유소 앞에는 생필품을 확보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스페인 중앙은행의 긴급 평가에 따르면, 이번 정전으로 인한 산업 생산 차질은 일일 GDP의 0.4%에 해당하는 손실을 가져왔으며, 특히 데이터센터와 제조업 분야의 피해가 집중됐다. 마드리드 상공회의소는 소상공인들이 입은 피해액만 2억 유로를 넘어설 것으로 추산했다. 음식점들은 냉장 보관중이던 식자재를 대거 폐기해야 했고, 일부 유통업체는 정전 기간 중 온도에 민감한 의약품과 식품의 품질 저하로 추가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사태 진정과 복구 과정
사태는 하루 뒤인 29일 아침 대부분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스페인 전력망은 99% 복구됐고, 포르투갈도 95% 이상 전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마드리드 오픈 테니스 대회는 중단됐고, 항공편 수백 편이 결항된 데다 열차 지연, 인터넷 불통 등 여파는 며칠 이상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포르투갈과 프랑스 남부, 모로코 일부도 연쇄적인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 전력공사(REE)의 비상 복구팀은 약 600명의 기술자를 총동원해 전력망을 복구했으며, 포르투갈과의 국경 지역에서는 양국 기술진이 공동으로 송전망 연결을 재개했다. 정부는 일부 도시에서 격일제 전력 공급을 실시하며 단계적 회복을 도모했고, 주요 병원과 필수 시설에는 군대의 비상 발전기를 투입해 피해를 최소화했다.
세계 각국의 대정전 사례와 교훈
이번 스페인-포르투갈 대정전은 21세기 들어 발생한 여러 대규모 정전 사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2003년 미국 북동부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발생한 대정전은 약 5500만 명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경제적 손실은 약 60억 달러에 달했다. 당시 한 전력선의 고장이 연쇄적으로 확산되며 8개 주와 캐나다 일부가 최대 4일간 전력 공급을 받지 못했다.
2012년 인도에서 발생한 대정전은 역사상 가장 많은 6억 2000만 명이 피해를 입은 사례로, 북부와 동부 지역 전체가 암흑에 빠졌다. 사회기반시설의 마비로 인해 수천 명의 광부들이 갱도에 갇히고, 델리 지하철이 중단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이 사태가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경우,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도쿄전력은 계획정전을 실시했고, 이로 인해 약 4500만 명이 영향을 받았다. 브라질에서는 2009년 이타이푸 댐 인근 송전탑 고장으로 7000만 명이 전력을 공급받지 못했으며, 2019년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서 발생한 정전은 4800만 명에게 영향을 미쳤다.
영국 왕립공학아카데미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대규모 정전 사태의 발생 빈도는 지난 20년간 37% 증가했으며, 특히 기후 변화와 관련된 사례가 60%를 차지하고 있다. 노후화된 인프라, 재생에너지 전환 과정에서의 계통 안정성 문제, 그리고 사이버 위협의 증가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전력망 강화를 위한 국제적 대응
이제 중요한 것은 향후 대응이다. 유럽은 전력망의 초국가적 연결을 기반으로 안정적 에너지 흐름을 유지해왔지만, 이번 사태는 그 연결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송배전 인프라 강화, 고압선 진동에 대한 실시간 진단 시스템, 다중 백업 전력망 체계의 도입이 시급하다. 전력망 운영에 있어 기후 변화에 따른 비정상적 변수까지 고려한 '기후 회복 탄력성(climate resilience)' 전략이 필수다. 또한, 사이버 보안 강화를 통해 외부 공격에 대한 방어 능력을 높이는 일도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4년 발표한 '전력 시스템 회복력 강화' 보고서에서 2030년까지 전 세계가 전력망 현대화에 3조 달러를 투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미 독일은 2023년부터 '전력망 스트레스 테스트'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약 180억 유로를 투자해 초고압직류송전(HVDC) 시스템을 구축중이다. 프랑스는 2022년부터 인공지능 기반 전력망 모니터링 시스템을 도입해 이상 징후를 조기에 감지하는 능력을 70% 향상시켰다.
스웨덴의 경우, 극한의 기상 조건에 대비한 '전력망 내한성 강화 프로그램'을 통해 -40℃의 혹한에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한 인프라를 갖추었다. 일본은 후쿠시마 사태 이후 자체 개발한 '마이크로그리드' 시스템을 통해 지역별로 독립적인 전력 공급망을 구축해 대규모 정전 시에도 필수 시설의 전력을 보장하고 있다.
한국의 전력망 안정성과 과제
한국전력공사(KEPCO)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연평균 정전시간은 가구당 약 8.9분으로 OECD 국가 중 상위권에 속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의 전력망이 밀집된 도시구조와 섬 형태의 고립된 계통으로 인해 대규모 정전에 취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2023년 한국의 재생에너지 비중이 14.7%에 도달한 가운데, 변동성 높은 태양광, 풍력 발전의 계통 연계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에너지경제연구원의 최근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서울 지역 핵심 변전소 2개가 동시에 고장날 경우 약 1000만 명이 전력 공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으며, 복구에 최소 12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측됐다. 특히 디지털 경제 비중이 높은 한국의 특성상 전력 장애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GDP의 0.7%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국내 전문가들은 노후화된 송배전 설비의 교체와 함께, 에너지저장장치(ESS) 확충, 스마트그리드 기술 도입 가속화를 통해 전력망의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분산형 발전 시스템과 지역 단위의 비상 전력망을 구축해 '전력 섬(power island)'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디지털 의존성과 우리의 준비 태세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경고를 준다. 스마트폰, 인터넷, 카드결제, 교통과 통신까지 모든 것이 전기 위에 놓인 사회에서 전력망 붕괴는 곧 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똑똑히 목격했다. 특히 재생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우리나라 역시 유사한 사태에 대한 예방과 대비책을 점검해야 한다. 탄소중립을 향한 전환의 길에서 기술적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친환경 목표는 오히려 '문명 정지'라는 역설적 재앙을 부를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의 '디지털 의존성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일상생활의 디지털 의존도가 세계 1위를 기록했다. 특히 모바일 결제 비중이 78.6%에 달하고, 공공서비스의 89.4%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제공되는 상황에서 전력 공급 중단은 사회 기능의 전면적 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 펜실베니아대학 위험연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디지털 의존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대규모 정전 시 시민들의 대응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정과 기업, 지자체 차원의 비상 대응 계획 수립도 시급하다. 개인적으로는 비상용 배터리와 태양광 충전기, 최소 3일분의 생필품과 현금 확보가 권장되며, 기업은 중요 데이터의 백업과 비상 발전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지자체는 취약계층을 위한 '냉난방 쉼터'를 겸한 '비상 전력 센터'를 설치하고, 정기적인 정전 대비 훈련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결론: 문명의 취약성과 우리의 선택
문명은 한낱 스위치 하나, 전선 한 줄 위에 아슬아슬하게(precariously) 얹혀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꺼졌던 불빛은 단순한 전력의 소멸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삶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불이 꺼졌을 때' 준비되어 있는가?
유럽연합 에너지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에너지 전환이 단순히 청정에너지로의 교체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회복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는 더 깨끗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 체계이지만, 그 길로 가는 과정에서 안정성과 회복력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그 미래는 언제든 암흑 속에 묻힐 수 있다.
디지털 문명의 불빛이 꺼진 이베리아반도의 18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현대 문명의 취약성과 함께, 더 견고하고 지속가능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위기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그 대응책은 지금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