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0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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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의 레 민 다오(Lê Minh Đảo) 준장이 지휘하는 5,000명 남짓의 18사단은 소수의 증원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 북동쪽 60km 지점에 있는 소도시인 쑤언록에서 1개 군단, 45,000명 규모의 북베트남 군의 공세를 4월 9일부터 21일까지 무려 15일 동안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그런데 이 전투는 사실상 베트남 전쟁의 막판에 벌어진 유일한 정규전이었다. 당시 북베트남 군을 지휘하던 반 띠엔 중(Văn Tiến Dũng, 1917~2002) 장군은 훗날 회고록에 자신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전투였다며 서술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사이공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에서는 이는 일시적인 방편애 불과하고 결국 사이공이 함락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북베트남 군은 병력을 7개 사단으로 늘려 2차 공세를 감행했다. 쑤언록의 주변 지역부터 제압 당해 보급로가 끊기고, 포위 당한 레 민 다오의 18사단은 결국 3군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아 4월 21일에 쑤언록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개 사단이 아무리 분투한다해도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이 전투는 그저 남베트남 군이 마지막으로 불태운 전투 밖에 되지 못했다. 


화면 캡처 2025-04-30 233832.png
사진 : 사이공 탈출 작전, 프리퀀트 윈드, 출처 : Bettmann Archive / Getty Images

 

이후 18사단은 이후 사이공 동부 방어선에 배치되어 끝까지 전투를 벌이다가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항복하고, 사단장 레 민 다오 준장은 생포되어 포로가 된다. 쑤언록 함락이 확정된 4월 21일 당일에 응우옌 반 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 1923~ 2001) 대통령은 쑤언록 함락 소식을 듣고 남베트남 지원을 포기한 미국을 맹비난하며 하야를 발표한다. 이는 앞으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모습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가족을 해외로 피신시킨 후, 25일 남베트남을 탈출해 대만으로 망명했다. 국가의 수장이 국민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한 것이다. 

 

공석이 된 총통직은 쩐 반 흐엉(Trần Văn Hương, 1903~1982) 남베트남 부총통이 이어받았다. 쑤언록 함락 소식과 반 티에우 대통령의 하야는 일반 시민들도 동요하게 만들었고 결국 공산화가 눈 앞에 다가왔다 여긴 남베트남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국을 비롯한 대한민국 등 제1 세계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마침내 프리퀀트 윈드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을 입안했다. 이 작전은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 대비하여 이미 세웠던 철수 작전의 일환이다.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옵션은 다음과 같다. 


① 떤선녓 공군 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 민항기로 공중 수송하는 옵션.

② 군용기로 공중 수송 옵션

③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 수송 옵션

④ 최종 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 수송 옵션


흔히 프리퀀트 윈드 하면 당일 새벽 미국 대사관 철수 작전을 생각하게 하지만 이는 최종 탈출 작전인 옵션 4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옵션 1~4항으로 구성되었다. 4월 23일, 사이공 떤선녓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군용기는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한 번에 수용 가능한 베트남인을 총 2,500명으로 제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그 숫자도 줄어들었다. 상황이 이렇개 되자 미군은 사이공에서 발이 묶인 탈출객은 물론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수용된 5,000명이 넘는 탈출객까지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괌이나 웨이크 섬, 요코타 공군기지로 실어 나르는 수 밖에 없었다. 

 

전날인 4월 22일까지 매일 20대의 C-141과 20대의 C-130이 사이공 떤선녓을 왕래하며 탈출객들을 필리핀까지 실어 날랐다. 우선 철수 작전이 수립되자 비행기 편 및 선박 편을 통해 자국민들을 남베트남 밖으로 피난시키고 있었으며, 한국 역시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들을 데려오기 위해 대한민국 해군 LST 2척을 파견했다. 이들 LST들은 공식적으로는 자국민 소개 목적이 아니라 구호품 전달 목적으로 출항했다. 도착하여 구호품 전달식을 크게 치르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4월 25일에는 미국 연방항공청이 떤선녓 공군기지의 민항기 운항을 금지했다. 몇몇 민항기 조종사들이 이를 거부하고 비행장에 착륙해 탈출객들을 실어 나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옵션 ①항은 25일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같은 날 미국 대사관을 경비 중이던 미국 해병대 대사관 경비단 소속 해병 18명을 지원하기 위해 미 해병 40명이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다. 추가로 그레이엄 마틴(Graham Martin, 1912~1990) 주 남베트남 미국 대사를 호위할 6명의 해병 역시 도착했다. 

 

주 베트남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비상 시 미국 대사관 직원 및 미국인 그리고 호주, 영국, 태국, 싱가포르, 프랑스 등을 비롯한 동맹 국가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프리퀀트 윈드 옵션 ④를 요청하고, 이것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군비 지출이 된다. 4월 27일, 사이공 외곽의 촐롱 지구에 북베트남 군의 포격이 시작되었으며 다음 날 28일에는 사이공 동쪽 30km 지점에 위치한 비엔호아가 함락되었다.  같은 날 쩐 반 흐엉(Trần Văn Hương) 총통 역시 취임한 지 1주일 만에 사임하면서 즈엉 반 민(Dương Văn Minh, 1916~2001)이 후임 총통이 되었다. 마침내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외곽에 진입했다. 


같은 날 저녁 18시 6분 즈엉 반 민 총통이 총통 선서를 할 때 북베트남으로부터 귀순한 조종사인 응우옌 탄 쭝(Nguyễn Thành Trung)이 지휘하는 북베트남 공군이 남베트남 군으로부터 노획한 A-37 공격기를 사용하여 떤선녓 공군 기지를 공습하여 비행기 몇 대를 파괴했다. 활주로를 이륙한 C-130을 향한 북베트남 군의 대공포 사격이 발생했으며 북베트남 군이 발사한 로켓포와 포탄이 산발적으로 공군기지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미국은 C-130의 운항을 일시 중단했다가 20시에 재개했다. 

 

21시에는 미 국방무관 호머 D. 스미스(Homer D. Smith Jr. , 1922~2011) 육군 소장은 지휘통제소에 내일 총 10,000명을 탈출시킬 60대의 C-130이 도착할 것이라 통보하였다. 4월 29일 오전 11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최종 단계인 옵션 ④가 발동했다. 그리하여 떤선녓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 (Landing Zone) 등 작전 입안 당시 사전에 선정되어진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들의 탈출이 개시되었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 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인원들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어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국 대사관 옥상만이 남게 된다. 


미국 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 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4월 30일 새벽 5시 헬기 편으로 주 베트남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을 포함한 2,100여 명의 피난민이 탈출했고, 2시간 후 대사관을 경비하던 미 해병대 병력 11명 역시 대사관에 걸려 있던 성조기를 내려 챙기고 탈출 헬기에 오르며 주 베트남 미군의 베트남 전쟁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종료와 함께 그 종결짓게 된다. 

 

남베트남의 붕괴 당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포함한 미국의 철수 작전, 그리고 자발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남베트남 국민은 총 138,869명이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장면이 2021년 8월 31일 아프가니스탄의 프리덤스 센티널 작전으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4월 30일 정오 경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대통령 궁에 진입해 금성홍기를 게양하고 즈엉 반 민 대통령으로부터 항복을 받으면서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이렇게 베트남은 남북이 통일되면서 완전히 적화되었다. 그리고 올해가 바로 베트남 적화통일 50주년이 되었으며 베트남 현지에서는 엄청난 행사들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을 보자. 동북아시아의 위기가 가속화 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의 주한미군은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우선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전략동반자협정"에 의해 러시아군의 북한군으로 참전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북한을 침공했을 시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했을 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막대한 무기를 제공하여 북한의 화력을 높여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다 중공 또한 북한을 도울지 말지 알 수 없지만 우선 러시아의 지원 만으로도 북한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2024년 5월을 기준으로 현재 주한미군의 규모는 28,500명이라 한다. 북한군의 위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계속 주한미군을 축소했던 결과가 이러한데 본국으로부터 계속 충원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지금 6.25 때와 같은 시기도 아니기에 영웅적인 미군의 희생을 바랄 시대 또한 아니다. 미군 또한 시대가 흐르면서 많이 바뀌었다. 전투에 대한 마음가짐, 무기, 전략 등등 6.25 이후, 75년이 지나면서 많은 부분에서 변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6.25 때와 같은 미군의 영웅적이고, 순수한 희생을 마냥 바라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당히 싸우다가 몰리게 되면 부산항 등에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이 재현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한미동맹 어쩌고 하지만 남베트남도 미국의 동맹이었고, 2021년에 종식된 아프가니스탄의 민주정권도 미국의 동맹이었다. 이들이 부패로 미국의 지원을 까먹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동맹을 버린 것은 맞다.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가능성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는 전쟁이 발생하면 안 되고 외교전으로 모든 것을 풀어야 한다. 베트남의 적화 통일 50주년 행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날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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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월 30일, 베트남 전쟁 종식 및 베트남 남북통일 된지 50주년을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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