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히틀러 사망 80주년을 맞이하여
히틀러는 과연 이 날 권총으로 자살했는가?
사망하기 마지막 몇 주 동안 히틀러는 자신이 소련군에게 체포될 때, 자신이 모스크바 동물원에 전시되거나 유태인이 연출한 연극에 주연으로 출연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걱정들은 4월 29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죽고 그의 시체가 로레토 광장에 있는 주유소 천장에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 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무솔리니의 시체에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는 소식을 듣자 히틀러는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히틀러가 일으킨 대조국전쟁으로 인해 2,700만 명이 넘는 소련인들이 학살당하고 국토가 초토화 되면서 나치 독일에 대한 증오가 대단했다. 당시 소련군 병사들은 옛 독일령 지역인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른 동부 지역을 점거했고 현 독일령 지역인 브란덴부르크와 작센 등지에서 독일군 포로 및 독일 민간인들에게 똑같이 학살, 약탈, 강간 등으로 보복했었다. 이를 감안한다면 히틀러의 걱정은 단순한 망상은 아니었다. 만약 베를린 공방전 당시 히틀러 부부가 퓌러벙커에서 소련군에게 생포되었다면 당시 악의에 찬 소련군 병사들로부터 조리돌림에 집단 린치를 당했을 확률이 높다.

소련군 장성들이 병사들의 히틀러 부부에 대한 폭행을 극력 제지했다고 해도 그의 연인인 에바 브라운은 처형되지 않았을 지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던 히틀러에게는 무조건 사형을 선고했을 확률이 높다. 이어 프랑스나 영국, 미국 같은 서방 연합국이 베를린을 함락했더라도 결과는 똑같이 서방 연합국 지도부들에 의해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에바 브라운의 경우, 복역 중에 결국 석방되었다 하더라도 유럽을 파괴한 전범의 애인은 악녀라는 불명예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나치 정권의 독일로부터 피해를 입었거나 전쟁을 치루었던 각 서방 국가들의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하며 다른 서방 국가들로의 해외 여행 및 방문을 하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겪었을 가능성도 높다.
다른 형식으로 히틀러에 대한 회고록 편찬 등으로 돈을 벌며 살다가 한 1980년대나 1990년대 즈음에 노환으로 자연사 했을 가능성도 높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 점령기 과정에서 벌어진 오라도르쉬르글란 학살 등 나치 독일이 일으킨 전쟁범죄로 큰 피해를 입었고 영국 또한 나치 독일 공군과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나치 독일군의 공습에 수도 런던이 파괴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에게 피해를 입었던 소련처럼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증오가 매우 강했다.
유럽과 거리가 아주 먼 미국 역시 추축국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나치 독일군이 유럽 일대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히틀러가 생포되었을 때 히틀러를 처벌해야 할 적국의 지도자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 중 그와 가까운 측근인 하인츠 링에(Heinz Linge), 기사인 에리히 켐프카(Erich Kempka), 그의 비행사인 한스 바우어(Hans Bauer) 등에게 자신의 유해가 적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히틀러는 당시 준비된 독약이 빠르고 확실하게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워했다.
히틀러가 아끼던 애완견인 블론디는 한밤 중에 화장실로 끌려와 히틀러의 개 조련사인 토르노브(Tornow) 상사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있을 때 관저 의료진 중 한 사람인 하제(Hasse) 교수가 집게를 이용해 독약 캡슐을 으깨서 먹여 죽었다. 곧이어 히틀러는 블론디의 시체를 무표정하게 한참 동안 바라보았고 다른 벙커의 사람들을 회의실로 불러서 마지막 환담을 나누었다. 히틀러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 없이 손을 내밀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그에게 말을 건넸으나 히틀러는 대답하지 않거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술을 움직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회의를 하고 동거녀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그의 부하들이 히틀러의 시체를 총통 관저 화원으로 가지고 나와 주차 된 자동차에서 무려 190리터나 되는 대량의 휘발유를 뿌려 화장했지만, 저장된 기름의 상당량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화장 시설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태운 게 아니었다. 이는 대충 시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소실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시 베를린이 나치 독일군과 연합군 사이에 혈투가 벌어지고 있던 중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는 자신의 사체를 철저하게 소각할 것을 명령했지만 불을 붙이자마자 연합군 공군의 폭격이 떨어졌기 때문에 모두 벙커로 도주했다고 한다.
더불어 인체의 상당 부분은 물로 되어있어 불로 태우려면 많은 자원과 시간이 필요했다. 엄청난 고열로 이루어지는 화장도 수십 분씩 소요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화장한 직후 소련군이 쏘아대던 포화로 인해 시신의 상당 부분 훼손됐지만 소련군이 치아를 대조하여 히틀러의 시신임을 확인했다. 이는 당시 히틀러의 치아가 매우 부실하여 거의 대부분 금속으로 된 의치였다. 따라서 소련군은 히틀러를 진료하던 치과의사의 조수를 찾아내 그의 시신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의 시체는 1년이 지난 1946년이 되어서야 겨우 전체 수습되어 비밀리에 탄약 상자에 넣어 매장되었는데, 스탈린은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이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보안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결국 이 탄약 상자는 독일과 소련 각지를 떠돌며 무려 8차례나 이장되다 결국 1970년대 중반 동독의 KGB 지부에 명령이 하달되어 두개골이나 이빨 등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일부분만 소련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화장했다.
그의 시신은 소련이 관할한 동독의 작센 안할트 주, 마그데부르크 근교 엘레 강에 뿌려졌다. 이것이 냉전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밝혀진 히틀러의 행방이다. 이후 스탈린은 아직 소식을 모르는 히틀러의 추종자들인 네오나치들에게 속임수를 쓰게 되는데, 히틀러의 시신의 행방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마치 히틀러가 살아있는 듯이 꾸며 네오나치들이 그 흔적을 찾는데 크게 고생하게 만들었다. 이 때 KGB 요원들도 스탈린에게 라틴 아메리카 일대에서 히틀러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1950년대까지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을 정도로 철저히 보안 유지 및 허위 정보 유포로 히틀러에 대한 상상력을 부추겼다.
2010년 5월 7일에 마침내 러시아에서 옛 소련 의무병들의 증언으로 히틀러가 1945년 4월 30일 청산가리 캡슐을 먹고 숨진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베를린에 남아 있던 나치 세력이 퍼트린 일종의 선전성일 가능성이 있지만, 정작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설을 유포한 것은 나치 세력의 선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소련에서 히틀러의 유골이라며 보관하고 있던 두개골에 구멍이 났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당시러시아의 크리스토포로프 중장은 히틀러의 입안에서 으스러진 유리 캡슐이 남아있는 점과 시신에서 씁쓸한 아몬드 같은 악취가 나는 점, 이어 사후 검시 결과 등으로 볼 때 청산가리 중독에 따른 사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했다. 따라서 의무병들이 히틀러의 시신에서 치명적인 외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혹은 청산가리 캡슐을 입 안에 넣고 깨무는 동시에 총을 쏘아 확실하게 죽으려고 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러시아 의료진들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다. 과연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살했을까? 청산가리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4월 30일은 히틀러의 죽음 80주년이다. 이 주기는 매우 특별하기에 네오나치들이 사방에서 준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우크라이나 각 도시들에는 아마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네오나치 단체들이 집단으로 운집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운집하는 장소에 러시아의 미사일들이 집중 공격하여 네오나치들을 박멸했음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