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17(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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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년대 들어 관료주의, 치욕에 대한 망각, 그리고 강남 이민족과 한족 사이의 알력 등등으로 남송의 발전은 둔화된 반면, 본래부터 체제를 개혁하며 권력을 쟁취한 쩐 왕조의 황실과 무신 세력들은 적극적인 군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처음부터 베트남 인들은 한족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던 데다, 이 왕조 시절부터 남방 태국 수코타이 및 크메르 제국, 참파 등과의 전쟁에서 기존에 자신들이 갖고 있던 전술과 무기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실감하고, 중국 남송과 금나라에 대한 시찰을 통해 중원의 체제가 부국강병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이 왕조에서 쩐 왕조로의 교체는 베트남 방식의 군국주의로도 빠르게 연결되었다. 과거부터 문제가 되었던 호족을 폐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함으로써 구체제를 혁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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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3세기 동북아시아의 세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특히 쩐 태종은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큰 반발과 적대감에 대처하기 위해서나, 승화시키기 위해서나, 정부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해외 침략을 벌이는 일이 최선이라 여겨진 것이다. 이는 1272년의 징병제 실시, 1274년의 라오스로 출병하여 메콩 강까지 영역을 확보하고 1285년의 몽골의 2차 침공을 격퇴하는 사건 등으로 현실화되었다. 1274년 라오스 정벌은 남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벌인 하나의 군사적 실험이었는데, 1271년에 라오스 지역, 즉 수코타이의 지배를 받은 란쌍 지역의 사냥꾼들이 북베트남 지역에 표착했다가 현지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대해 란쌍의 세력들은  오랜 기간 동안 퐁나케방 산악 지대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왔기에 란쌍 세력들은 쩐 왕조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배상을 요구했다. 


이를 쩐 왕조가 거부하자 결국 1274년에 3,600명의 란쌍 군이 퐁냐케방을 침공했지만 결국 패배했고 이에 폰사반(Phonsavan)을 침공해 란쌍 군을 제압했다. 이에 마지못해 회담에 나선 란쌍과 수코타이 지방 관리들은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분쟁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러나 쩐 왕조는 2년 뒤, 군대를 다시 라오스에 파견하여 란쌍의 수비대를 공격하고는 그것을 빌미로 좀 더 강한 군대를 이끌고 팍산(Paksan)까지 내려가  메콩 강의 수로를 장악하고 수코타이의 관리를 만나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도록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코타이와 쩐 왕조의 시각 차이가 드러났다. 라오스의 입장에서는 퐁냐케방에서의 문제로 배상금을 지불했고 란쌍과 쩐 왕조가 배상과 영토를 확정한 조약을 맺은 것이라 생각해 그리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태국 본토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메콩 강 중류 지역은 스스로 지방 관리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비교적 소액으로 쩐 왕조와의 괜한 불화를 무마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고 여겼고, 란쌍 역시 명목적인 종주권만 유지해 왔기 때문에 쩐 왕조와 종래의 ‘교린’을 재개하는 일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중화 적이며 비교적 선진적인 법체계를 기준으로 삼고 있던 쩐 왕조는  여기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퐁나케방 침공과 더불어 수코타이나 란쌍이 배상을 한 것이나, 메콩 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란쌍 지역의 남부는 쩐 왕조 정부가 관리하겠다고 명시한 것은 이들이 모두 수코타이의 종주권에서 탈피했음을 인식했다. 특히 메콩 강 중류 지역의 경우에는 베트남의 영토권이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1279년, 쩐 왕조는 팍산 지역을 박산(博算) 현으로 선언했다. 이와 같은 시각 차이는 점차 표면화되며 양국의 불화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후 1280년대로 넘어가면서 남송이 몽골 제국이 세운 원(元)나라에게 멸망하면서 광서, 광동 지역이 공백 지역으로 남게 되었고 광서, 광동 지역에는 남송의 잔존 세력들이 들어와 항몽 전선을 수립했다. 이와 같은 세력 재편의 초기 과정에서 동방의 3국은 제각기 극심한 내부적 갈등을 해결해야 했다. 베트남의 경우는 몽골과의 화의파와 항쟁파, 원나라는 한족과 몽골족의 대립이 있었다면 태국의 경우에는 모든 정치 변동의 중심에 수코타이와 아유타야 종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 있었다. 특히 원나라의 경우, 최대의 정적이면서도 혈연 지간인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의 정쟁은 완벽한 종결을 맞이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정치 과정에서 우열을 가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노골적인 전면전으로 승패를 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은 기존의 칭기즈칸 혈족들과 색목인들을 대거 등용하며 아리크부카 세력을 견제했고, 아리크부카로써는 때로 몽골 쿠릴타이 귀족들, 때로는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칸국이나 킵차크 칸국에 붙으며 집요하게 쿠빌라이의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


베트남 쩐 왕조의 개혁이 집권 세력인 이 왕조 호족들에 대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듯이, 원나라의 정쟁도 쿠빌라이를 처단하라는 상다수의 몽골 귀족들이 쿠빌라이의 원나라 조정을 배신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쿠빌라이가 몽골 황족들을 달래기 위해 1280년 관직 우선권을 설치하고 1281년에는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매우 유화적인 개혁 조치를 이어가자, 쌓이던 불만은 1282년의 아리크부카의 결정적인 패배로 인해 잠재워졌다. 별기군에 비교된 아리크부카의 군대는 상당히 뒤떨어진 기병 전술로 쿠빌라이를 상대했고 쿠빌라이는 한족의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화약과 화포를 전선에 배치하여 아리크부카의 기병대를 격파한 것이다. 이들은 아리크부카의 편에 섰던 몽골 귀족,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귀족들과 그에 동조했던 티베트 인들의 처벌했으며, 아리크부카의 본진인 몽골 카라코룸을 장악한 쿠빌라이는 다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그동안의 아리크부카를 칸으로 임명했던 조치들을 모조리 취소하고 몽골 울루스의 대칸 지위까지 석권했다.


한편 쩐 왕조는 광서 지역을 직접 습격했다. 이 때 상당수의 이재민들이 귀주 지역으로 피신했고 광서 지역의 남송 잔당들은 거의 전몰하다시피 했다. 이에 완충지대가 사라진 원나라가 가만히 않을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먼저 원나라 군을 공격한 측은 쩐 왕조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주변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에 둔감했던 원나라는 쩐 왕조가 태국 수코타이를 노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쩐 왕조가 귀주와 광동, 일부 티베트 인들은 서쪽에서 파촉(巴蜀)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지켜본 쿠빌라이는 쩐 왕조로의 해안가 측으로의 침공을 지시했다. 특히 태국에 대해서는 1279년, 당시 수코타이 최고 실력자이 국왕인 람 캄행(Ram Khamhaeng)에게 북방 남 하(Nam Ha) 지역을 쩐 왕조에게 넘어가면 안보가 완전히 흔들린다며 베트남에 대해 명목적 종주권에 만족하던 종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쩐 왕조의 내정에 간섭하고 쩐 왕조를 확실히 종속시켜야 한다며 복속이 아니라 일종의 식민지로 대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람 캄행 국왕이 이를 거절하자 원나라는 빠르게 병력을 파견하여 십송판나(西双版纳)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약 2,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곤명으로 잡아갔다. 이어 운남(雲南) 남부 지역과 현 미얀마의 켕퉁(Kengtung)까지 접수하고 수코타이를 복속시킨 다음 원나라의 상인들과 병력이 태국 북부 지역에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때 먼저 고립 위기에 처한 쩐 왕조는 격앙되었다. 쩐 왕조의 성종(聖宗) 황제와 재상인 쩐 흥다오는 원나라와의 직접적인 전쟁을 벌여 동남아시아 북부 지역을 몽골에게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강경한 주장을 쏟아냈다. 그리고 육군을 이끌고 있던 쩐 왕조의 군국주의화의 주축으로 알려진 쩐 냣히유(陳日皎)는 원나라를 가상의 적국으로 삼는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을 추진했다. 1283년 이후 국방비가 쩐 왕조에서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종전의 두 배에 가까운 25% 이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원나라는 대국이었고, 정면 대결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력을 쓰지 않고도 라오스 북부 남 하 일대에서 쩐 왕조의 전략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었는데, 하나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이 지역을 중립화하는 방안, 다른 하나는 수코타이 북쪽 영주들과 운남의 영주들이 자체적으로 독립 및 친베트남 노선을 걷도록 돕는 방안이었다. 이 중 두 번째가 현실로 옮겨진 것이 1284년에 발생한 남 하 지역의 민란이었다. 남 하와 십송판나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다리족과 묘족, 카렌 족 등은 수코타이와 원나라 정부에 대해 반기를 들었고 이는 다소 지나치게 모험적이었으나, 쩐 왕조는 레 푸쩐(黎輔陳) 등의 외교력이 뛰어난 사신들을 앞세워 몰래 민란을 도왔다.  마침 원나라는 메콩 강 상류의 지배권을 두고 미얀마 파간 왕조와의 전쟁에 들어가 있었기에, 남 하와 십송판나 일대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리라는 기대가 그와 같은 모험을 부추겼다. 


하지만 원나라 차크차크두(徹徹都)의 빠른 개입으로 인해 이 같은 민란은 3일 만에 끝났으며, 다리족 등은 베트남에 망명했다. 베트남은 남 하 일대에서 원나라가 한 수 앞서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듬해인 1285년 남 하 일대와 라오스 북부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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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후반의 동남아시아를 둔 남송, 원나라, 베트남 쩐 왕조, 태국 수코타이, 미얀마 파간 왕조를 둘러싼 치열한 국제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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