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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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북로인 오이라트와 싸워 나라를 구한 우겸과 같은 충직하고 청렴한 관리가 있었던 것에 반해 이러한 인물들의 최후는 대부분 편안하지 못했다. 반면 이러한 인물들의 희생을 먹고 자라는 간신배들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중원 한족들이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를 세워 통일했지만 이들 나라 중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나라는 명나라였다. 이러한 명나라의 부패함과 무능함을 주도했던 간신들은 환관들이었다. 물론 정화와 같은 인물은 해외로 원정하여 명나라의 위세를 끌어 올렸지만 그와 같은 인물은 사실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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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明世宗, 출처 : 维基百科, 明世宗

 

엄숭(嚴嵩)은 강서(江西) 신여시(新餘市) 분의현(分宜縣) 사람으로 자는 유중(惟中), 호는 면암(勉庵), 개계(介溪), 분의(分宜)이다. 언뜻 보면 상당히 위세를 떨친 인물로 생각되지만 실제 이 인물의 내력을 보면 문필력 하나는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다. 이는 그의 문집인『검산당집(鈐山堂集)』에서 나타나는데 그가 25살 때이던 1505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급제했다는 등을 볼 때 그는 명나라에서 수재 측에 들어가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엄숭에게는 중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막강한 성리학 계통의 학통들이 중앙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에 의해 황제의 권력 자체도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토목보의 변 이후, 헌종 성화제(憲宗, 成化帝), 효종 홍치제(孝宗, 弘治帝) 시대에 어느 정도 세력을 되찾았다. 특히 효종 때는 대명률(大明律)을 개정하여 문형조례(問刑條例)를 반포하였고 법규를 정비하기 위해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개정하는 한편 서부(徐溥), 유건(劉健), 이동양(李東陽), 왕서(王恕), 마문승(馬文升), 구준(丘浚) 등 유능한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구준이 헌정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수렴하였고, 마문숭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 그러한 시기였기 때문에 엄숭이 중앙으로 파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종 정덕제(武宗, 正德帝)에 이어 세종 가정제(世宗, 嘉靖帝)가 즉위했다. 세종은 헌종 성화제의 손자이자 흥헌왕 주우원의 둘째 아들로 본래는 황위 계승과 상관없는 인물이었지만 형 주후희는 태어난지 5일만에 요절하였고 그가 부왕으로부터 흥헌왕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사촌형인 무종 정덕제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그는 황제로 추대되어 등극하게 된다. 세종 가정제는 전임 정덕제의 아들이나 친동생이 아니라 사촌동생으로 방계로부터 들어와 즉위했기 때문에 황제로써 누구의 뒤를 승계했는지에 관한 문제와 사촌형인 정덕제나 백부인 홍치제의 양자로 입적이 된다면 생부인 홍헌왕의 처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큰 관건이 되었다.

물론 <주자가례> 에 의하면 황제나 왕의 지위를 계승한 자는 그 전임자 사자가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임자의 아들이나 다름 없는 위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가례>의 원칙을 중시하는 양정화(楊廷和) 등을 위시한 성리학 체제의 관료들은 일부 절충하여 정덕제 대신 백부 뻘인 홍치제를 양아버지로 두고, 효종을 황고(皇考)로, 생부인 흥헌왕은 황숙고(皇叔考)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주자가례>의 원칙 때문에 숙부로 해야한다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당연히 세종은 이를 불편하게 생각했지만 성리학 계통의 유학자들의 세가 막강했고 세종의 편을 들어주는 중신들은 몇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세종은 효종을는 황고(皇考)로 친아버지인 흥헌왕은 황숙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 가정제를 도와주는 슈퍼히어로와 같은 자가 등장하니 그가 바로 엄숭(嚴嵩)이다. 엄숭은 세종에게 주청하여 궁을 걸어 잠그고 친위군인 금군을 동원하여 아버지 흥헌왕을 황제로 추존하라고 하자 세종은 이를 따라 흥헌왕을 황제로 추존한다. 신료들은 궐문 밖에서 대대적인 농성전을 펼쳤다. 아버지를 황제로 추촌하려던 세종과 엄숭은 친부를 황고, 홍치제는 황백부라 칭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리하여 황제파와 정부가 정면으로 대립하는 대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친위대 금군과 엄숭이 이 사이 총병관(總兵官) 직위에 있던 구란(仇鸞)을 설득해 하북성 쪽의 방위군 15만을 북경에 집중시키자 이에 힘을 받은 가정제는 자신의 뜻을 밀어붙여 아버지 홍헌왕을 황제로 추존을 확정함과 동시에 양정화 등을 파직시키거나 주살했다. 


이후 세종은 중신 190명을 형부에 수감한 뒤 양정화를 비롯한 주모자를 변방으로 유배보냈으며, 4품이상 관리는 강등시키거나 봉급을 박탈하고 5품이하 관리는 장형으로 다스려 16명의 하급 관료들은 형문을 이기지 못하고 장살당했다. 이 대례의 의는 3년의 논쟁끝에 가정제의 뜻대로 되어 효종 홍치제는 황백고로 불렸고 장태후를 황백모라 하기로 하고 종결되었다. 


이 사건의 공로로 인하여 엄숭은 예부상서로 승진해 본격적으로 중앙에 진출하게 된다. 세종은 즉위 초기에는 정치 개혁을 어느 정도는 강구했으나 나중에는 도교에 빠지게 되었고 궁 안에 단을 만들고 신선을 부르기까지 하여 명나라의 법도를 어지럽히게 된다. 세종의 이러한 행위는 결국 조정 대사에는 당연히 관심이 적어지게 마련이었다. 특히 엄숭(嚴嵩)은 제문을 남들보다 잘 썼기 때문에 경건한 도교 신자인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러한 공으로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에 올랐다. 이후에도 승진을 거듭해 내각의 수보(首輔), 즉 재상의 직위에까지 올라갔다.


이후 세종은 더욱 도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져 불로불사(不老不死)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그는 단약을 제조하는데만 많은 시간과 민중들의 세금들을 허비하게 된다. 그리고 허황된 불로장생의 약초를 찾아 각지로 사람을 파견하기도 했다. 심지어 엄숭은 이러한 세종에 진언하기를 불로불사의 단약을 제조하기 위해 12~14세의 궁녀들의 첫 생리 혈액을 응고하여 경단을 만들어야 효험이 있다고 어이없는 진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어린 궁녀들은 붙들려 강제로 월경액을 채취당하는.. 소위 말하는 짐승 같은 짓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궁녀들 중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 등 16명이 세종을 죽이기로 모의하게 된다. 이들 궁녀들 나이가 12~14세로 세종의 엽기적인 행위의 피해자들이었던 것이다. 1542년 겨울 마침 세종이 단비(端妃) 조씨(曹氏)의 궁에서 자고 있을 때 이들 궁녀들은 세종이 잠든 틈을 타서 그를 목졸라 죽이려고 했다. 목을 졸리는 상황에서 세종을 구한 것은 황후 방씨(方氏)였다. 이 사건으로 양금영등 16명의 궁녀는 거열형(사지를 찢기는 형)에 능지처참까지 당하고 단비 조씨는 그들 궁녀 16명이 잠입하는데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죄목과 더불어 이들 16명의 궁녀를 관리 감독하던 영비(寧妃) 왕씨(王氏)도 이들 궁녀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황후 방씨의 명에 의해 주살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임인궁변(壬寅宮變)이라 불려진다. 


이러한 세종은 다분히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첫 번째 황후였던 진씨(陳氏)는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세종의 발에 걷어차여 복중에 있던 아들과 함께 절명하였고 두 번째 황후였던 장씨(張氏)는 가정제 자신이 만든 단약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출되어 냉궁에서 병사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황후였던 방씨에 대해서는 임인궁변 당시 자신이 총애하고 있던 영비(寧妃) 왕씨(王氏)를 주살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몇 년뒤 황후가 거처하던 곤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세종은 그저 그를 방관만 하면서 황후를 구출하지 않았다. 결국 임인궁변 당시 세종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방씨는 자신이 목숨을 구해주었던 세종에 의해 불에 타죽고 만다.


세종의 광폭 행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556년 역대 자연재해피해 순위의 2위권에 드는 산서성에서 대지진이 일어난다. 당시 산서 지방에는 탄광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지진에 대한 대비책이 부족한데다가 관료들의 대처도 미흡했고 세종은 아예 이 문제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다. 특히 엄숭은 아들 엄세번(嚴世蕃)과 함께 구호물품들을 빼돌려 자신들의 재산 목록에 채웠다. 그러한 부분으로 인하여 이후 여진이 발생하였어도 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엄청난 이재민이 발생했음에도 지방 정권에서는 이들 이재민들을 거지 취급하여 추방했다. 이러한 불만들이 결국 한데 모여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때에 감숙성 영하 지역에서 타타르 출신 용병 보바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보바이의 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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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몰락으로 이끈 비선실세 엄숭(嚴嵩)과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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