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폴란드 총독부를 비롯한 동유럽 점령지의 도시들에서 부활시켜 유대인을 몰아넣을 수용구역으로 이용했으며 이는 엄청난 악명을 떨쳤다. 바르샤바 게토가 수용인구 45만 명에 달해 가장 컸고, 우치에 20만, 르비우에 15만, 빌뉴스에 8만, 크라쿠프에 7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이들 대도시 외에 여러 중소도시에도 게토가 세워졌다.

이 게토와 이전의 역사적 의미의 게토의 다른 점은 역사적 게토는 유대인들을 유럽의 다른 토착 기독교도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좁은 구역에서 거주하게 한 반면, 나치가 부활시킨 게토는 이후에 있을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위해 세웠다는 점. 당연히 이전의 게토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인구 밀도가 높고 비위생적이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3.4㎢의 면적에 45만 명을 수용하여 인구밀도가 10만명/㎢을 넘었다.
더불어 사망률도 비할 수 없이 높았다. 게토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지 않은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2차 대전 당시의 게토는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도 있었다. 상하이(上海) 등 일본군의 점령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 또한 일정 구역의 게토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이곳의 주거 환경 역시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그나마 홀로코스트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나치 독일이 점점 패망하면서 폴란드의 게토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 봉기를 시발점으로 무기를 밀수하여 그곳에 있던 나치 독일군들과 해방 전투를 벌였는데 아쉽게도 진압당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 유대인들도 나치 독일군들에게 희생당하게 된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그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슈필만이 게토에서 생활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은 도저히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나치 독일군들에게 핍박을 받거나 돈을 별로 못 받아 먹을 걸 먹지 못한 나머지 아사(餓死)한 사람들도 많았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의 아버지가 감자를 가지고 돌아오던 도중에 나치 장교가 인사를 안했다고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나치 독일 통치하의 게토는 심각한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
도리어 유대인들끼리 서로의 음식을 훔쳐먹거나 나치군에게 뭐라도 얻어먹으려고 광대같은 짓을 하는 등, 게토에서의 생활을 잘 표현했다. 게토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영화 <피아니스트>를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영화를 찍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유대계였기 때문에 고증에 신경써서 찍은 편이다. 같은 시기를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 에서도 초반에 비중있게 나온다.
독일인 군수사업가로서 유대인 인력을 이용하러 온 상황에서 고급 숙소를 제공 받는 쉰들러와 열악한 환경에 내던져진 강제 이주 유대인들의 상황이 대비된다. 그나마 <피아니스트>의 슈필만 가족은 한 집을 단독으로 배정받았지만,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아예 한 집에 서로 연고도 없는 여러 가구가 집어 넣어진 상황들이 묘사된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독일은 게토를 끝장내고, 여러 차례에 걸쳐 수색해 소개령에 응하지 않고 숨어 있던 유대인들까지 철저히 학살했다.
라트비아 리가의 홀로코스트에는 독일과 라트비아인들이 유대인들 가두고 학살한 전쟁범죄의 장소다. 라트비아인들은 유태인을 색출해 4만 명이 넘는 숫자의 유태인들을 체포하고 대부분 처형했다. 이같은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도 라트비아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사과 한 번 한적이 없다. 따라서 라트비아의 네오나치들이 소수 활동하고 있음에도 유대인 학살에 대한 죄의식이 그다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