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24(토)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좋은 일자리”의 조건은 무엇인가 – 최하층 노동자부터 시민 중심까지 바꾸는 노동정책의 재설계


서론: “좋은 일자리”란 질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좋은 일자리’는 모두가 원하는 바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일은 드물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은 ‘주 4일제’ ‘고임금 첨단 산업’ ‘청년 디지털 일자리’ 등을 쏟아내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외면되기 일쑤다. 광주에서 법정관리를 마친 위니아딤채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서 고용 보장을 외치는 현실, 돌봄노동자들이 최저임금과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현실을 보며, 다시금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가 바라는 ‘좋은 일자리’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가.


1. 사례로 본 현실: 위니아딤채 노동자들의 절규

2025년 5월 7일, 서울회생법원 앞에서 금속노조 위니아딤채지회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1년 반의 법정관리를 마치고도 자산 매각 방식으로 고용 승계가 보장되지 않자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노동자들은 “딤채라는 브랜드만 남기고 고용은 파기되는 구조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영업 양도·양수 방식’을 통한 회사를 살리자는 요구를 했다.


이 사건은 단지 하나의 기업 구조조정 사례가 아니다. 현재 한국 노동시장이 안고 있는 고용불안, 체불임금, 비정규직화, 브랜드 자산의 사유화와 같은 구조적 문제의 집합체다. 실제로 대유위니아 계열사 3곳에서만 700억 원이 넘는 임금이 체불됐고, 대표이사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동자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런 사태에 대한 국가의 대응은 미미하다. 법적 보호는 미비하고, 회생 절차도 자본의 손에 맡겨져 있다.


2. 구조적 원인: 왜 일자리는 위험해지는가

국제노동기구(ILO)의 이상헌 고용정책국장은 ‘좋은 일자리’의 조건으로 △노동자의 안전, △적정한 소득, △차별 없는 존중, △노동자의 발언권을 꼽는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노동시장은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시키기 어렵다. 특히 최하층 노동자, 플랫폼 종사자, 여성·이주노동자, 고령 노동자들은 취약성과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산업 구조 자체가 노동자를 비용으로 간주하고 있고, 고용보다는 ‘유연한 인력 활용’을 강조한다. 플랫폼 노동은 자유 대신 불안을, 프리랜서는 자율 대신 책임 전가를 낳았다. 결국 좋은 일자리의 기본 조건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3. 대응 시도: 독일과 광산구의 ‘사회적 대화’

이 같은 위기에 대한 해법은 없을까. 독일은 ‘산업 4.0’의 도입과 함께 ‘노동 4.0’을 국가 전략으로 추진했다. 이들은 기술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 도구로 ‘사회적 대화’를 설정하고, 노동자 보호와 일의 질을 향상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노동 시간 선택법’과 ‘장기 노동 시간 계정제’는 육아와 돌봄, 생애주기에 따른 유연한 근무를 제도화한 좋은 예시다.


이와 유사한 접근이 한국에서도 등장했다. 광주 광산구는 독일 모델을 참고해 시민 중심의 ‘지속가능 일자리 특구’ 정책을 추진 중이다. 지난 2023년부터 약 8개월간 1400여 개의 시민 질문을 수렴해, 일자리 정책에 반영할 핵심 의제 20가지를 도출했다. 단순히 고용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임금 구조, 안전한 일터, 디지털·기후 위기 대응, 일·가정 양립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4. 제도와 법의 사각지대: OECD 평균에도 못 미치는 노동환경

한국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노동시간이 가장 긴 축에 속한다. 2023년 기준 한국 임금노동자의 평균 근로시간은 연 1874시간으로, OECD 평균 1717시간보다 157시간 더 길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루 11시간 연속 휴식과 주 1일 이상 연속 휴일 보장,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이 필수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단지 시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32만 명이 주 52시간을 초과해 일하고 있지만, 이들은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 같은 비정상적 구조를 정상화하지 않고는 ‘주 4일제’ 같은 선진형 모델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5.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정책 방향

이상헌 국장은 “공공이 나서야 기업도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도록 유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북유럽 국가처럼 공공부문 일자리 비중을 30% 가까이 끌어올리고, 특히 돌봄·교육·환경 분야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이 분야는 ‘여성의 일’ ‘값싼 일’로 치부되어 왔지만, 실제로는 미래 사회를 지탱할 핵심 기반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플랫폼 독점 구조에 대한 규제와 노사정 3자 간 공정한 대화 구조,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 일자리를 만드는 주체가 기업이라면, 그만큼의 사회적 책임도 감수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


결론: 좋은 일자리 정책은 ‘가장 아래’에서 시작해야 한다

모든 일자리를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출발점은 분명하다.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부터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 시민이 정책 수립의 주체가 되는 것, 노동을 ‘비용’이 아니라 ‘삶의 가치’로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일자리 정책은 단지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살아갈 기반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2025년 5월 7일 오후 05_20_31.png
지금 우리가 만드는 일자리 정책은 단지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살아갈 기반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사진: 생성형AI]

 

전체댓글 0

  • 29733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좋은 일자리란 무엇인가?”… 노동자 삶의 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정책 재설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