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쑨원, 장개석과의 밀월 관계, 미하일 보로딘(Михаил Бородин, 1884~1951)의 세 번째 이야기
쑨원 사후, 장개석과의 밀월 및 제1차 국공분열의 단초
보로딘은 쑨원에게 당 규약 개정 초안을 제출하며 국민당을 레닌주의 노선으로 개조할 것을 건의했다. 마침 이 시기에 천중밍이 광저우를 회복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토지 재분배, 최저임금제, 주 6일 근무, 하루 8시간 근무제를 시행하여 농민과 노동자들로 하여금 전투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지원자들을 받아들여 방어 부대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국민당의 상인 및 향신 출신 당원들은 이와 같은 볼셰비키화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상인 및 향신 출신 당원들은 청나라 말기 때부터 지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홍콩을 이용해 영국, 프랑스, 독일과의 직접적인 교역으로 인해 많은 부와 토지를 독점했으며 이들이 혁명의 당위성으로 세운 것은 신해년의 혁명 때부터 남방 지주들의 이익을 보전해주기로 약속한 상태에서 이들의 합류로 인해 벌어진 혁명이었다. 이들이 격렬히 반발한 것은 이와 같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얻은 막대한 양의 토지를 재분배하라는 것에서 이미 심한 반발이 야기되고 있었다.

중국 남방 군벌이 정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쑨원과 보로딘과 더불어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를 주도했던 랴오중카이(廖恩煦)조차도 갑작스러운 볼셰비키화는 주요 지지자들을 잃을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보로딘이 국민당을 볼셰비키화 시키는 1차 시도는 실패했지만 당시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과 중국 남방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쑨원과 랴오중카이를 이해하고 넘어갔다. 천중밍의 군대가 철수한 이후 쑨원은 보로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기 때문에 보로딘이 적화를 미루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천중밍의 군대가 물러간 후, 1924년 1월 20일부터 1월 30일까지 보로딘의 지휘 아래에 국민당 1차 전국 대표 회의가 광저우에서 열리게 된다. 보로딘은 쑨원의 부탁을 받고 직접 중국 국민당 당약을 개정하여 당 조직 개편 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소련 볼셰비키 당 조직을 모방하였기에 거의 적화되다시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국민당은 삼민주의와 오권분립을 창시한 쑨원을 총리로 하며, 쑨원을 전국 대표 대회와 중앙 집행 위원회의 당 연직 주석으로서 양 기구의 결의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게 된다.
이는 천두슈(陳乾生)를 비롯한 공산당에게 총리 자리 및 국민당의 주도권이 넘어길 것을 우려한 국민당 우파를 고려해서 나타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보로딘도 천두슈(陳乾生)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작용했다. 철저한 스탈린주의자인 보로딘에 비해 천두슈(陳乾生)는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 스탈린이 그다지 트로츠키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때, 보로딘에게 있어 천두슈(陳乾生)가 총통 직위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같은 공산주의자여도 매우 껄끄러웠던 것은 분명하다. 국민당 1차 전국 대표 회의에서 쑨원은 종신직을 보장받게 되었고, 국민당은 레닌이 주창한 민주주의적 중앙 집권제를 갖춘 혁명 정당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트로츠키주의와도 대치되는 부분이었기에 천두슈는 코민테른이 국민당과의 당내 합작을 지시하자 반대를 표명했던 것이다. 그는 1923년 3차 광동 정부가 수립되어 선전주임을 맡았지만 보로딘과의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일찍부터 갈라 설 준비하게 된다. 당시 청년이었던 모택동(毛澤東)도 국민당에 합류하여 선전부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회에서 41석의 위원 중 10석을 공산당이 차지하게 된다.
또한 전국 대표 회의 운영의 경험이 없던 국민당에 대표 회의 체제를 이식하고 전국 대표 회의 주석단을 설치함으로 제법 건실한 조직을 갖추게 된다. 재건 대회의 결과로 국민당은 소련의 정부 기관처럼 이중 권력 구조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보로딘은 자유 민주주의를 주창하던 옛날의 국민당은 죽었다고 호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국민당 내부에는 수많은 비좌익 계열 당원이 남아있었고, 이들은 쑨원이 공산당에게 지나치게 양보를 하는 것을 크게 불만을 가졌다. 이러한 이루질 수 없는 무리한 좌우 합작은 후일 국공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고, 1925년 8월 20일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외교부장 후한민(胡漢民), 군정부장 쉬충즈(許崇智)가 숙청된 이후 린썬(林森), 쩌우루(居正) 등이 화북으로 추방되자 격노하여 1925년 11월 서산회의(西山會議)를 개최하여 상하이 당 중앙을 수립함으로 인해 서산회의파로 분열되었다. 그들이 추방된 자리에는 담평산(譚平山)과 임조(林祖)를 비롯한 공산당원이 차지했다. 이로 인해 국민당 수뇌부의 우파는 가히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좌파 및 공산당이 국민당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황푸군관학교(黄埔軍校舊址)의 설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를 중심으로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창설에 기여했다.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은 오늘날 대만, 중화민국 국군의 시초로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던 대만의 군대를 볼셰비키의 미하일 보로딘의 건의에 의해 정예군을 탄생된 것이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이에 국민당 우파의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한 공산당은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중심으로 중국 볼셰비키로 하여금 독자적인 무력을 갖추게 해달라고 보로딘에게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보로딘은 국공합작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했기에 이를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보로딘과 볼셰비키, 공산 세력을 지지해 주었던 쑨원이 1925년에 사망한다. 이와 더불어 국민당 좌익의 거물이자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가 국민당 우파에 의해 암살되면서 겨우 이루었던 국공합작도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보로딘은 왕징웨이(汪精衛), 장개석을 지원하여 적화에 우환거리였던 국민당 우파들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들의 용의자들로 몰아 숙청해버렸다. 이들은 국민당을 장악하여 3두 정치를 이끌게 되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장개석과의 사이가 매우 좋아 소련 당국에도 장개석에 대해 매우 좋은 평가를 하며 보고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개석의 정계 포지션은 매우 애매한 위치에 있었고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물이었지만 보로딘과의 돈독한 관계는 오히려 장개석이 쑨원의 후계자로써위치를 부각시켜었다. 그랬기에 냉철하기로 소문난 보로딘조차도 장개석과의 사이가 깨질 염려가 없다고 호언장담했을 정도였다. 장개석은 왕징웨이의 집권을 도와 천중밍을 상대로 한 2차례의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천중밍을 축출하자 국민당에서 최고의 군사실력자로 자리잡으며 국민당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의 고문들는 장개석을 두고 '너무 쉽게 격정에 휩싸이고 난 뒤 똑같이 너무나 쉽게 의기소침해져 중용의 도를 지키지 못하고, 냉정함과 확고부동한 면이 부족하다'며 혹평했다. 그러나 장개석 외에 왕징웨이를 매우 우유부단하다 평가했기에 소련은 장개석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장개석을 두고 "파탄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긴밀한 사람'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장개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기에 보로딘과의 돈독한 관계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장개석은 1926년 1월 1일 개최된 국민당 제2차 전국 대표 대회에서 왕징웨이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어 중앙 집행 위원회에 당선되었다. 이는 소련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소련 덕택에 정치적 입지를 닦은 장개석은 북방 군벌들이 내분에 휩싸여있는 틈을 타서 쑨원의 유지였던 북벌을 시행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당과 소련은 국민당의 기반과 노동자, 농민 정책의 실시가 불충분하여 북벌을 실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여 반대하였고 그동안 장개석의 행보에 강한 의문을 품어온 공산당 당원들 또한 장개석에 대한 반장, 도장 분위기를 연출하며 장개석을 비난했다. 그리고 이러한 장개석의 북벌에 가장 심한 반대를 한 사람이 소련의 수석 군사 고문인 발레리안 쿠이비셰프(Валериан Куйбышев, 1888~1935)였다. 쿠이비셰프는 노골적으로 장개석의 북벌에 반대하며 북벌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장개석을 배제하고 왕징웨이와 다른 군사 실력자들을 지원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벌 문제와 더불어 쿠이비셰프와의 갈등으로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졌고 불안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1차 국공합작의 분열은 이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