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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의 시대, 한국인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다

 

절반이 넘는 국민이 느끼는 '울화통'… 단순한 감정을 넘어선 사회적 신호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지난 4월 18세 이상 국민 15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 국민 절반 이상(54.9%)이 '장기적 울분 상태'에 있다고 응답했다. 이는 단순히 일시적으로 화가 난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부당함에 대한 깊은 분노와 무력감이 장기화된 상황을 의미한다. 심리학자들은 울분을 '정당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상황이나 사건에 의해 야기된 강렬한 분노 정서'로 정의한다. 이러한 울분이 만성화되면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울대 홍진표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울분은 단순한 개인의 감정 문제를 넘어 사회 구조적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정성이 훼손된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체계적인 배제와 차별을 경험하며, 이러한 경험이 장기화될 때 '울분 장애'라는 심리적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 이번 조사 결과는 한국 사회가 집단적 울분 상태에 진입했음을 경고하는 중대한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울분'은 특수한 현상이 아닌 한국인의 일상이 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심각한 울분'을 겪는 이들의 비율은 12.8%에 달했고, 중간 수준 이상의 울분을 느끼는 이들을 포함하면 전체의 55%를 넘는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연령별, 소득별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30대의 17.4%가 심각한 울분 상태에 있었고, 월 소득 200만 원 미만 집단에서는 그 비율이 21.1%까지 치솟았다.


2023년 전국 정신건강 실태조사와 비교해보면, 울분의 상태는 점점 심화되고 있다. 전년도에는 '중등도 이상 울분'을 경험한 비율이 48.7%였으나, 올해는 54.9%로 6.2%p 증가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청년층과 저소득층에서 울분 지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취업난, 주거 불안정, 소득 양극화 등 이들이 직면한 구조적 어려움이 울분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이처럼 특정 집단에 집중되는 울분 현상을 '구조적 울분'이라고 명명한다. 이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장벽에 직면했을 때 발생하는 집단적 감정 상태로, 단순한 스트레스 관리로는 해소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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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지 않은 사회, 근본적으로 무너진 제도적 신뢰


울분의 가장 큰 원인은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었다. '기본적으로 세상은 공정하다'는 진술에 69.5%가 동의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 사회의 기본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수치다. 특히 정부의 비리, 정치권의 부패, 안전 참사에 대한 부실 대응 등이 높은 울분을 유발하는 사안으로 지목되었다. 국민의 85%가 '입법·사법·행정부의 비리 은폐'에 울분을 느낀다고 답했다.


세부적인 울분 유발 요인을 분석한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범죄에 대한 관대한 처벌'(87.3%), '권력층의 부당한 특혜'(86.7%), '재난 상황에서의 정부 대응 부실'(86.2%) 등이 가장 높은 울분을 일으키는 사안으로 나타났다. 이는 법치와 안전, 공정한 기회라는 사회의 기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느낄 때 울분이 극대화됨을 보여준다.


한림대 자살과 학생정신건강연구소 김현수 소장은 "공정성에 대한 인식은 단순한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신뢰의 바로미터"라며 "울분 지수의 상승은 사회 통합의 약화와 직결된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조사 결과, 울분 지수가 높은 응답자일수록 사회 제도와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현저히 낮았고,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보였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반복된 부당함과 그에 대한 시정 노력의 좌절은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체념으로 이어지며, 이는 개인의 심리적 탄력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국민 정신건강의 총체적 위기 상황


응답자의 47.1%는 최근 1년간 건강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했으며, 27.3%는 기존의 역할이나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신건강 위기를 겪었다고 답했다. 이는 4명 중 1명 이상이 심각한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OECD 국가 평균(15~20%)을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자살 관련 통계다. 정신적 위기를 겪은 사람 중 51.3%는 자살을 생각했고, 13%는 실제 시도를 했다고 응답했다. 이를 전체 응답자로 환산하면, 약 14%가 자살 사고를, 3.5%가 자살 시도를 경험한 셈이다. 이는 자살예방백서가 발표한 국가 통계(자살 사고율 13.4%, 시도율 2.9%)보다 높은 수치로, 울분이 자살 위험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울분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불면증, 만성 피로, 집중력 저하 등의 신체적 증상부터 우울, 불안, 분노 조절 장애 등의 정서적 문제까지 광범위하다. 특히 울분이 만성화될 경우, 우울증, 적응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 다양한 정신질환의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연세대 의대 정신과 강지인 교수는 "울분은 그 자체로 질병은 아니지만, 다양한 정신질환의 전조 증상이자 악화 요인"이라며 "특히 한국 사회처럼 감정 표현에 제약이 많은 문화권에서는 억눌린 울분이 내면화되어 더 심각한 건강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사회적 고립의 악순환


정신건강 위기를 겪은 이들 중 60.6%는 어떠한 도움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낙인과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사회적 분위기(41.9%),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현실(22.6%)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이는 한국 사회의 정신건강 지원 체계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매우 취약함을 보여주는 결과다.


특히 울분을 경험하는 이들은 자신의 상태를 '치료가 필요한 질병'으로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울분 수준이 높은 응답자일수록 "나의 문제는 개인의 노력이 아닌 사회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러한 인식은 전문적 도움 추구 행동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정신건강 서비스의 접근성이다. 전국 지역사회 정신건강 서비스 현황을 분석한 결과, 인구 10만 명당 정신건강 전문인력은 평균 4.2명에 불과했다. 이는 OECD 평균(15.3명)의 1/3 수준이며, 도시와 농촌 간 격차는 더욱 심각했다. 농어촌 지역의 경우, 전문인력이 전무한 지역도 다수 존재했다.


서울대 정신의학과 안용민 교수는 "정신건강 서비스의 불균형은 지역 간 건강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라며 "특히 경제적, 지리적 취약계층은 울분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에서도 배제되는 이중의 소외를 경험한다"고 지적했다.


개인 치료를 넘어선 사회적 개입이 필요한 시점


이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의료적 치료를 넘어서 사회 시스템이 공정성과 신뢰를 회복하도록 구조적 개편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문가들은 울분을 독립적인 정신건강 문제로 관리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다각적 접근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먼저 울분에 대한 의학적 개입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약물치료 외에도 인지행동치료, 수용전념치료(ACT), 감정 해소 훈련 등 정서 중심의 접근이 효과적일 수 있다. 최근 독일과 스위스의 연구진은 '울분 상담(embitterment counseling)'이라는 새로운 치료 프로토콜을 개발해 긍정적 결과를 얻고 있다고 보고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울분의 원인이 되는 부당함과 불공정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필수적이다. 이는 단순한 복지 확대를 넘어,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 강화, 권력 남용에 대한 강력한 제재, 안전망 확충 등을 포괄한다. 특히 취약계층이 경험하는 구조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가 요구된다.


교육적 측면에서는 감정 리터러시(emotional literacy)와 회복탄력성(resilience) 함양을 위한 프로그램이 확대되어야 한다. 학교와 직장에서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고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울분의 만성화를 예방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고려대 사회학과 조명래 교수는 "울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피해자 책임론'에서 벗어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며 "특히 공적 제도에 대한 신뢰 회복이 울분 해소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정신 방역'이 시급하다


"한국 사회는 단지 병든 것이 아니라, 울분을 안고 병들어간다." 정신의학자 홍진표 교수의 이 말은 현 상황의 심각성을 정확히 짚어낸다. 공정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정신건강은 필연적으로 위협받는다. 따라서 정신건강 정책은 복지의 영역을 넘어, '정서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울분의 해소는 개인의 '마음 관리'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사회적 통합과 신뢰 회복을 위한 근본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사법정의, 기회의 평등, 제도적 투명성 등 사회 기본 가치의 복원이 시급하다. 국민의 55%가 만성적 울분 상태에 놓인 사회는 결코 건강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독일의 정신의학자 미하엘 라인 교수는 "울분은 개인의 질병이 아니라 사회의 신호"라고 말한다. 울분의 확산은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경고등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신건강 전문가뿐만 아니라 법조인, 교육자, 정책 입안자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이 필요하다.


감정을 말할 수 있는 사회,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만이 울분의 시대를 벗어날 수 있다. 공정과 신뢰라는 사회적 기본값이 회복될 때, 비로소 한국인의 마음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울분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집단적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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