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1일, 한 세르비아인 결혼식장에서 총격사건이 발생한다. 이 당시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과 무슬림에게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이 반대한 국민투표 당일 사라예보의 바슈차르시아에서 세르비아의 국기가 휘날렸는데 이는 무슬림들에게는 도발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날 바슈차르시아 광장에서 일어난 총격전은 엄청난 비극을 양산했다. 당시 신랑 측 아버지인 니콜라 가르도비치(Nikola Gardović)가 사망하고 세르비아 정교회 사제는 큰 부상을 입었다. 당시 총격 사건의 목격자들은 살인범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붕괴 이후 범죄자로 활동했던 폭력단 단원이자 보스니아 내 보슈냐크인 계열 준 군사 조직이었던 그린베레의 일원이며, "첼로"라는 가명으로도 알려진 라미즈 델랄리치(Ramiz Dellalić)였다.

델랄리치와 공범들에게는 곧바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밀로세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민주당(SDS)에서는 이와 같은 총격 살인 사건을 비난하며 살인범을 체포하지 못한 것은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보스니아 민주행동당(SDA)이 이끄는 보스니아 정부가 범인과 공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제트베고비치의 대변인은 세르비아인이 치명적인 위험에 빠져 있으며 독립국인 보스니아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라 주장하며 이러한 공모 주장에 반박했다. 그러나 애국연맹의 창립인 중 한 명이자 보스니아 육군대령인 세페르 할릴로비치(Sefer Halilović)는 이 사건이 결혼식이 아니라 도발이었으며 결혼식 하객들이 밀로세비치를 추종하는 세르비아 민주당 소속의 운동가들이라 비난했다. 그러자 다음 날 새벽부터 시내 주요 번화가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세르비아 민병대들은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하고 복면을 썼다. 이들 민병대들은 세르비아 민주당(SDS)의 지지자들로 친 세르비아계 인사들의 저택 곳곳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현재 사라예보에는 그 사건이 벌어진 저택인 집, 당시 결혼식이 이루어졌던 곳이 보존되어 있다.
1992년 세르비아 민병대들이 사라예보 의회 건물 근처에서 바리케이드 및 저격수를 배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 쿠데타와 같은 위협은 사라예보 시민 수천명이 저격수 앞으로 행진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1992년 3월 3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보스니아 전 지역에서 세르비아군과 정부군 사이에서 산발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게다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 국가로서의 승인을 앞두면서 이 충돌은 계속되었다. 4월 5일에는 세르비아 민족 출신의 경찰관이 경찰서를 공격한 이후, 보스니아의 내무부 사관학교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장교 2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 그러자 다음 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의장단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내전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날 이후, 사라예보의 세르비아 민병대들은 지난 달에 했던 행동들을 반복했다. 이 때 모든 민족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시민들 중 50,000명에서 100,000명 가까이의 시위대들이 행진하면서 다시 또 철수했다.
가장 큰 시위대 무리가 의회 건물을 향해 이동하자, 무장 괴한들이 이들을 향해 사격을 가하기 시작해 수아다 딜베로비치(Suada Dilberović)와 올가 수치치(Olga Suchići)로 이름이 알려진 젊은 여성 2명이 사망했다. 이 두 명은 포위전의 최초 사망자로 기록되었다. 이 여성들을 죽인 무장 괴한들이 누구인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여러 증언들로 보아 이들은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단체들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유고슬라비아를 해체시키려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 일원들이 이들을 지원했을 가능성은 훗날 보스니아 내전으로 알려진 참혹한 전쟁에서의 그들의 역할로 미루어 볼 때 매우 높다고 본다. 한편 그녀들이 살해당한 브라바냐 다리는 이후 그들의 이름을 따서 딜베로비치-수치치 다리라고 명칭이 바뀌게 된다. 한편 1992년 4월 6일, 미국과 유럽 공동체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승인하게 되면서 보스니아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이탈이 사실상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되자 이와 동시에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후 스르브스카의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는 미국과 유럽 공동체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독립 승인을 확인하고, 1992년 4월 6일 14시부터 연방 주도국인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원 하에 세르비아 접경 도시인 팔레(Pale)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인 공화국의 이름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8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분할한 스르브스카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내부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되면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민족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직접적인 개입보다 스르브스카 정부군 및 민병대를 활용하는 방식을 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2년 3월 18일에는 보스니아 내의 3개 세력의 대표인 보스니아 측 대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ć), 세르비아 측 대표 라도반 카라지치, 크로아티아 측 대표인 마테 보반(Mate Bovan) 등은 모두 리스본 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하지만 1992년 3월 28일 이제트베고비치는 사라예보에서 당시 주 유고슬라비아 미국 대사인 워런 짐머만(Warren Zimmermann)을 만난 이후 협정 서명을 없었던 일로 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이제트베고비치는 보스니아 내 모든 인종 간의 분열을 반대하고 통합 국가만을 추구한다고 언급했다. 이 때 당시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했는지, 또한 누가 말했는지 아직도 불분명하다. 다만 짐머만이 이후에도 회고하기를 이제트베고비치에게 협정 서명을 철회한다면 미국은 보스니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겠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논쟁 여지가 없는 이유는 같은 날 이제트베고비치가 협정 서명을 철회하고 합의안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에 진실은 두 사람만의 비밀 회동이었 때문에 두 사람만이 알고 있다. 한편 1992년 4월 6일, 유럽 연합 외무장관 12명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독립국으로 인정한다고 통보했다. 이어 미국은 그 다음날 보스니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했다. 그러자 보스니아 내에서는 곧바로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브라세의 사관학교 훈련소를 공격하고, 박격포, 대포, 전차를 동원하여 시내 중앙의 트램 전차기지와 구시가지를 포격했으며, 사라예보의 공항을 점령했다. 보스니아 정부군은 독립국으로 인정한 이후 UN이 평화유지군을 파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전쟁이 보스니아 전역으로 확대될 때까지 군사는 파견되지 않았다. 1992년 5월 2일,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군이 사라예보의 봉쇄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요 도로를 막으면서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막았으며 도시로 향하는 전기, 물, 난방 등의 공급 처리 시설도 막아버렸다. 이 세르비아 군은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를 방어하고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군에 비해 크게 열세에 놓여 있었다. 수많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장갑 부대 대열이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한 후, 세르비아군은 약 200회의 포격전으로 주변 고지의 벙커와 방어 진지들을 공격하면서 방어력을 약화시키는데 집중했다. 이에 노보 사라예보를 장악하기 위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의 공세는 수차례 이어졌다.
이와 같은 포위전을 견제하기 위해 1992년 5월 30일에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사라예보 국제공항을 안전 지역 내로 편입시킬 것을 요구했고, 6월 말부터는 유엔의 공수 물품이 들어오게 되면서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 보급품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포위하고 있는 세르비아 군에 비해 보스니아 정부군은 매우 미약한 무장만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보스니아에서의 암시장에서는 전쟁 초기에 참전했던 보스니아 군의 무기들을 불법적으로 밀수하거나 세르비아군을 습격하여 노획한 무기를 판매했다. 1993년 중반에 완공한 사라예보 터널은 사라예보의 방어군을 포함한 보스니아 전쟁에 참여한 모든 세력들에게 국제적인 무기 금수 조치를 우회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 터널은 도시의 수비군들에게 필요한 무기 및 여러 생활 용품들을 보급했으며, 이 터널을 통해 일부 시민들이 사라예보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이 터널로 인해 사라예보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그곳을 사라예보의 "희망의 터널"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