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1편
동, 서파키스탄의 분리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배경
1611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마술리파트남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인도 대륙에 진출한 영국은 7년 전쟁에서 프랑스-무굴제국 연합군을 상대로 플레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인해 인도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세포이 항쟁 직후인 1858년에는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세우면서 영국은 인도를 완전히 식민지화 하게 되었다. 이후 인도의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이 퇴진하고, 인도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식민지들과 해외 영토들이 상호 간의 자결권을 주장하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가 총리에 당선되면서 인도의 독립이 가시화 되었다. 그러나 독립을 눈앞에 두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 하에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힌두교 세력과 이슬람에 의해 같이 탄압 받고 있었던 시크교-자이나교 비무슬림 세력, 그리고 기타 무슬림 세력들 간의 종교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무슬림 세력들이 인도 내 무슬림 국가 수립을 요구하자 비무슬림 세력이 이를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인도 대륙 전역이 비무슬림과 무슬림 간의 충돌과 보복 학살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수십만 명이 살해되는 등 인도는 종교 집단 간의 극심한 갈등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도 내부의 종교 간의 갈등과 유혈 분쟁이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하게 된 영국은 결국 인도 대륙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의 별개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1947년 8월 14일에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더스 강 유역과 동부 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독립했고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비무슬림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각각 독립하게 된다. 이와 같은 종교적 갈등 속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는 통일 인도와 종교간의 화합을 주장하며 인도 대륙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할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분열을 막는데 실패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간디는 1948년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라는 힌두교 급진파 청년의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별개로 독립한 파키스탄과 인도는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카슈미르의 지배권을 두고 격렬한 전쟁을 벌이며 최악의 원수 관계가 되었다. 한편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인도와 분리되어진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일대의 서부 파키스탄과 갠지스 강 삼각주 일대의 동부 파키스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두 지역 간의 갈등이 곧 시작되었다. 사실 서부 파키스탄과 동부 파키스탄은 종교 및 종파만 같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을 뿐, 문화와 인종, 언어 등 모든 부분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특히 동부 파키스탄의 경우, 오히려 인도의 힌두교도들과의 공통점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두 파키스탄 사이에 인도가 존재했기에 서부 파키스탄과 동부 파키스탄이 아주 멀리서 나뉘고 있었기에 교류 또한 빈번하지 못했다. 참고로 두 국가 간 가장 가까운 거리는 약 1,500㎞로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한편 서부 파키스탄의 독립을 이끌었던 무함마드 진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는 당시 인도 총독인 루이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1900~1979)에게 제시받은 인도-파키스탄 분할 계획에 큰 충격을 받아 분리 독립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가 수상이 될 수 없게 방해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며, 공개석상 자리에서 공공연히 강경한 어조로 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영국인들을 끈질기게 괴롭혀 네루에게 권력을 주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지 않겠냐는 식의 발언을 측근들에게 자주 했다. 진나는 그러면서 인도 제국 총참모부 측에 파키스탄의 지정학적인 구도가 생존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계속 문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도 제국군 총참모부 측은 캘커타가 파키스탄에 포함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할 것이며, 캘커타가 파키스탄 영토에 포함되어도 소련이 침공할 경우,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정작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이 시작 단계로 전환되면서 진나는 파키스탄의 문화적 정체성이 무슬림 신앙에 우선한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서부 파키스탄의 영토를 최대한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인도 총독 마운트배튼은 이를 거절했고, 최소한 펀자브 주와 벵골 주 전체를 파키스탄에 포함시키려 했던 진나의 의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당시 마운트배튼은 파키스탄이 당시와 같은 기형적인 국토로 25년 이상 국가로써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 예측했고, 실제로 파키스탄 건국 24년 만에 동부 벵골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국가인 방글라데시를 건국하면서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우선 벵골 지역의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우선 무굴 제국이 붕괴된 이후 그 전까지 무슬림에게 탄압을 받던 힌두교도들이 영국의 통치 하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으며 변호사, 기술자, 의사가 되어 무슬림보다 부유해져 있었다.
무슬림들은 이와 같은 부분을 매우 불평등하게 보았으며 벵골의 힌두교인 지주들의 착취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독립 파키스탄 수뇌부들은 진나를 비롯한 서부 파키스탄 출신들이 대거 장악했기 때문에 동부 파키스탄의 영향력이 현저히 약할 수밖에 없었다. 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철저히 서부 파키스탄 위주로 운영되었고, 심지어 동부 파키스탄에서조차 고위 공직은 서부 파키스탄 출신들이 차지하고 중간 관리직위로는 인도에서 동부 파키스탄으로 피난 온 무하지르들을 우대하는 등, 토착 벵골인들은 거의 배제당하다시피 했다. 동부 파키스탄은 서부 파키스탄으로부터 공공연하게 무식한 사람들, 혹은 검은 유인원 소굴이라는 형식으로 비하 당했으며, 쌀, 소고기, 생선, 열대 과일 등 모든 식량 자원들을 서부 파키스탄에 수탈당했다. 그리고 동부 파키스탄에 배정되는 예산은 서부 파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의 40% 정도 선에 불과하는 등 공공연한 차별을 받았다. 문제는 인구 자체는 동부 파키스탄이 더 많았다는 것에 있었다.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직전 파키스탄의 인구가 서부 파키스탄은 6,000만, 동부 파키스탄은 6,800만으로 동부 파키스탄이 인구 수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21세기에는 파키스탄의 인구가 방글라데시보다 훨씬 많아졌으며 이러한 서부 파키스탄의 인구 증가 이유는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이후 대부분 인도 대륙의 인프라들이 파키스탄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어 인구 증가가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반면에 파키스탄은 상대적으로 살 만한데다 이슬람 극단주의 정권의 우민화 정책으로 인해 인구증가가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동부 파키스탄 주민들의 서부 파키스탄 주도의 정부에 대한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고 이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의 단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