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2편
파키스탄의 국부(國父) 무함마드 진나와 뱅골인들의 독립 의지
동, 서파키스탄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인 1948년 3월 22일에 파키스탄의 국부(國父)로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알리 진나 총독이 동파키스탄을 방문했다. 그가 당시 총독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 때 파키스탄이 명목상 영국의 자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셨을 뿐, 내정에 있어서 자치권 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가진 사실상 독립 국가였다. 진나는 동파키스탄의 중심지 다카에서 모든 점에서 우월한 아리아 인만이 파키스탄의 진정한 민족이라며 동파키스탄의 언어인 벵골어를 버리고 서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두어만 사용하자고 연설해 벵골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벵골인인 동파키스탄인들도 인종적으로는 아리아인이 맞다. 이와 같은 진나의 발언은 벵골인들이 당시 파키스탄의 다른 민족들보다 피부색이 짙고 검다는 점에서 비롯된 차별 의식에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대 인류학자들 상당수가 현대인들의 인종주의가 사실 인종 간의 이질성보다 피부색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진나의 이와 같은 차별성 발언은 단순히 벵골인들에게만 굴복하라고 주장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서조차 우르두어 화자는 독립 시점일 때 7%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토박이가 아니라 인도 땅에서 넘어온 실향민들로 알려진 무하지르들이었다. 당시 파키스탄에서 2위의 언어로는 28.4%가 사용하던 펀자브어였으며 7.1%는 파슈토어, 5.8%는 신드어를 사용했다. 이는 문화적인 이질감으로 인한 분열을 우려한 진나로서는 무굴 제국 시절부터 공용어로 사용되던 우르두어로 대동 단결하여 이질감을 줄여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어 진나 본인 또한 우르두어를 외국어로 배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라치 태생인 진나는 이주민인 부모님으로부터 구자라트어를 모어로 익혔다. 그런데 진나는 동파키스탄 연설의 전체 문맥에서 통합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국가가 되었으니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자며 설득했다는 설도 있다. 따라서 기존 언어가 아니라 우르두어를 새로운 서파키스탄의 공용어로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보면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갈라졌던 것은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는 정책이 성공한 측과 실패한 측으로 분류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독립하던 시점에 이르러 파키스탄 국민의 55%가 모국어로 벵골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인도 제국 시절부터 벵골어를 사용해왔던 벵골인들에게 완전 외국어나 다름없던 우르두어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1948년 2월 25일, 벵골인들의 지도자인 디렌드라 나트 두타(Dhirendra Nath Dutta)는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해줄 것을 서파키스탄 국회에 요청하였으나, 당시 서파키스탄 총리 리아카트 알리(Liaquat Ali, 1895~1951)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무슬림의 언어는 오로지 우르두어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어 1948년 3월 22일, 동파키스탄에서 진나의 연설이 양 파키스탄의 충돌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 연설이 진나가 영국령 파키스탄의 총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파키스탄을 방문하여 했던 연설이었다.
그리고 이 연설을 한 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48년 9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벵골인들의 분노만 키운 상태에서 동, 서파키스탄을 통합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에 진나 총독의 우르두어 단일화 연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이 주도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에 우르두어를 강요하게되고 동시에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던 벵골어를 우르두어와 유사하게 아랍 문자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강력한 벵골어 박해가 이루어지자 동파키스탄 시민들은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벵골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ভাষা আন্দোলন)을 벌이게 되었고, 1952년 2월 21일 다카 대학교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서파키스탄 정부의 언어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져 결국에는 시위대와 파키스탄 군 사이에 대량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독립한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2월 21일을 국경일인 언어 운동 기념일(ভাষা আন্দোলন দিবস)로 기리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벵골인들의 모국어를 지키기 위해 벵골어 국어 운동을 기념해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했다.
1951년 10월 16일, 진나의 후계자 리아카드 알리 칸 총리가 암살된 이후 벵골인 총리인 카와자 나지무딘(Khwaja Nazimuddin)이 총리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1953년 4월, 서파키스탄인 총독인 굴람 무함마드(Ghulam Muhammad)에게 일방적으로 해임당하면서 하야했고 벵골인들은 또 다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처럼 동파키스탄의 벵골어 국어 운동은 1954년에 발생한 헌법 개정으로 인해 벵골어가 우르두어와 함께 국어로 지정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55년, 동부 벵골의 행정 명칭이 동파키스탄으로 변경되면서 벵골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1961년에는 종교를 불문하고 벵골인들의 큰 자랑으로 여겨졌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탄생 100주년 행사를 두고 서파키스탄에서 타고르를 반파키스탄적인 인물이라 매도하면서 벵골은 또 다시 크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의 프로파간다를 차단한다는 구실로 타고르의 작품을 금지 처분하는 한편, 벵골어로 된 모든 도서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강력한 조치는 이후에 철회되었으나 1967년, 파키스탄 정부는 타고르 작품을 다시 금지하였고, 이에 분격한 19명의 동파키스탄 지식인들이 집단 항의한 것을 시작으로 시민 저항 운동이 벌어졌다. 이와 같이 벵골 문화 탄압이 발생한 것은, 벵골 문화에 대한 서파키스탄 측의 원칙 및 신념을 가진 증오나 적대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좀 강제로 제압하겠냐는 편의적인 망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서파키스탄 측이 벵골 문화에 심각할 정도로 무신경하고 무감각하다고 평가했으며 오히려 관심이 없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유브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의 군사 독재가 수립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는데, 파키스탄 군부의 주축인 펀자브인들은 벵골인들을 열등한 존재이며, 벵골의 가치는 오로지 해외 투자 유치 및 무역에만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심각한 경제적인 착취를 당했는데, 1950~1955년 사이에 파키스탄 정부가 지출한 개발비의 20%만 동파키스탄에 사용되었으며, 1965년에는 조금 늘었으나 그래도 35%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파키스탄은 생산품의 40~50%를 동파키스탄에 강매하면서 사실상 식민지 시장처럼 사용되었고, 동파키스탄의 무역 흑자는 모두 중앙정부가 압수하여 서파키스탄의 무역 적자를 충당하는 것에 사용했다. 1950년대까지 동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은 서파키스탄의 2배에 달했으나, 1969년에 이르러서 서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이 동파키스탄보다 61% 높을 정도로 동파키스탄은 철저히 착취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 파슈툰인들의 벵골인 차별에 분노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은 1949년 아와미 연맹(বাংলাদেশ আওয়ামী লীগ)이라는 정당을 결성하면서 저항을 기획했다. 그리고 아와미 연맹 정당의 당수로 1948년 벵골어 국어 운동을 주도하던 방글라데시의 국부(國父)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이 선출되었다.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1958년 들어 아이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서파키스탄의 헌정을 파괴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하자 동파키스탄에 대한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었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경제적 격차도 더욱 커지게 되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 아유브 칸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 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그런데 1970년 11월 12일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사이클론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더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동파키스탄의 시민들은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각계에서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정작 서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동파키스탄의 구호에 매우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며 뱅골인들의 반발을 샀다. 이어 사이클론이 상륙된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서야 경계를 내리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 정도만 동원했을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전혀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에 대한 이유로 적대국인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인도 정부는 서파키스탄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게 된다. 이는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 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부터 독립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한편 동파키스탄 시민들의 시위 때문에 퇴진한 아이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야히아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다. 그러자 이듬해인 1970년에 치뤄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역구 300석을 인구 비례에 따라 동파키스탄에 162석, 서파키스탄에 138석을 배정해 놓았는데 2곳을 제외한 동파키스탄의 160개 선거구에서 아와미 연맹이 승리를 거두었고 여성 국회의원을 위해 추가로 두었던 13석 또한 동파키스탄으로 배정한 7석을 전부 아와미 연맹이 차지했다. 그 결과로 인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7석,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획득했으며 이대로라면 단독 집권이 가능했던 상황에 있었다.
이에 제2당으로 88석을 차지한 파키스탄 인민당 당수 줄피카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 1928~1979)는 아와미 연맹과의 협상에 나섰는데 그는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치적 인 핵심 지역인 펀자브와 신드에서 승리했으며 다수당인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함으로 인해 아와미 연맹을 공격하기도 했다. 1971년 1월 5일에 부토는 자신이 아와미 연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협상에 나서려 했으나, 막상 그는 동파키스탄에 대한 자치권 부여에 대해 반대했다. 부토는 서파키스탄의 다수당인 파키스탄 인민당과 동파키스탄의 다수당인 아와미 연맹에게 정권을 분리할 것을 제안했으나, 무지부르 라흐만은 제1당인 아와미 연맹이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부토와 야히야 칸은 아와미 연맹의 총수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총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3월 3일로 예정된 국회 개원을 3월 25일로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이에 동파키스탄 전체에서 항의와 총파업이 이어지는 등 정국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