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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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초기 부족들은 B.C 12세기에 서술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견들과 고대를 소재로 한 참고문헌들에서는 B.C 7세기와 그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고 이 시기에는 보다 기술이 진보된 야금 및 황금 세공 기술들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신분 계급이 나타나며 또한 고대 정치와 왕국 형성의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B.C 2000년과 B.C 750년 사이 카프카스 지역이 히타이트, 우라르투, 메데스를 비롯한 최초의 민족들과의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교류에 의한 유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킴메르의 침입을 받게 된다. 킴메르가 소아시아로 진군하다가 스키타이-아시리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이후, 킴메르 인들은 카프카스로 돌아와 카프카스 원주민과 함께 거주했고 이들은 서로 혼혈하여 통합되었다. B.C 700년경에 이러한 형식으로 통합되었던 최초의 카르트벨리안은 스반스(Svans), 쟌스(Jhans)의 서부 카르트벨리안과 동부 카르트벨리안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은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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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고대 카프카스 조지아 : 콜키스와 이베리아 왕국,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그러한 분리는 카프카스 방언의 분리로도 형성되는데 카프카스 언어 중 조지아어는 동부 카르트벨리아어가 시초로 밝혀지며 중세 시대 그리스어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생성되었다. 이 외에도 서부 카르트벨리아어의 방언들을 검토해보면 스반어, 쟌 방언에서 유래된 두 갈래의 방언인 메그랄어와 라즈어가 현대 카르트벨리아어의 형식을 이끌게 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된 15세기에 정교회를 기반으로 한 동, 서 카르트벨리아어문으로 성경책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조지아어문이 통합되어 오늘의 조지아어가 되는 역사를 갖게 된다. 통합되기 전 언어의 분리를 검토해보면 로마 시대 지명에 표기된 사메그렐로(Samegrelo) 지역은 현대 조지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 조지아의 주(州) 또는 자치공화국들인 스바네티(Svaneti)와 압하시아, 쟌스 지역에서는 고대 콜키스어의 기초인 스반어가 구사되었다. 


반면에 동부 카르트벨리아어는 현대 동부 조지아의 다수 언어로 형성되면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카프카스 남서부 고대 언어의 형성과 발달은 문화적 지리적 경계의 결과로 나타났으며 지속적인 타 민족들의 유입과 더불어 여러 변화의 요소를 띄게 된다. 고대 언어와 문화의 형성은 후일 B.C 8세기 말에 서부 조지아와 동부 조지아의 두 중심지가 각기 다른 문화적 접변에 의해 생성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문화적, 언어적 접변과 형성된 경계로 인하여 생성된 두 조지아 왕국은 콜키스 왕국으로 알려진 서부 조지아와 이베리아 왕국의 동부 조지아로 나타난다. 그리고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고 이베리아 왕국은 우라트루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콜키스는 고대 그리스에도 흑해 해양 교류로 알려진 국가이다. 그리스의 신화인 이아손과 아르고선의 용사들의 주역이 되었으며 그들은 B.C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해애 황금양모를 찾아서 콜키스를 여행했는데, 남서부 콜키스에는 카르트벨리아의 스반족과 쟌족이라는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대 콜키스를 구성하는 또 다른 민족은 B.C 1000년 B.C 500년 사이에 네아더스(Neders), 피티스(Phiters), 디오스쿠리아스(Diosqurias), 구에노스(Guenos), 파시스(Pasis), 압사로스(Absaros)와 현재 터키의 리제(Rize)로 알려진 리조스(Rizos)의 해안 지역들에 살고 있는 부족들이다. 이들은 많은 무역 식민지들을 건설했던 그리스인들이 대부분으로 콜키스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조지아의 동부 지역은 B.C 6~4세기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동맹들과 주도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장기적인 전쟁에서 마침내 므츠헤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카르틀리 부족의 승리로 종결된다. 조지아의 고대사 문헌들에 의하면 카르틀리 왕국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 이베리아로 알려진 나라다. 


이들은 B.C 300년경에 파르나바즈 1세(Parnabaz I)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그는 파르나바지드(Parnabazid) 왕조의 첫 번째 통치자로 기록되어 있다. B,C 653~B.C 333년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메디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연속적인 침략에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격퇴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B.C 3세기 말 남부 이베리아 지역은 그레코-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군을 목격하고 이를 방어하게 된다. 카프카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용한 이베리아는 고지대에 여러 성을 축조하여 방어기지들을 확립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거느리는 침략군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카프카스 북부의 스키타이-사르마트 등의 유목 종족들과도 공조했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방어와 공조로 인하여 이베리아와 콜키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나 어떠한 중동의 헬레니즘 제국 후계자들에게도 합병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화는 계속하여 이베리아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리스어는 콜키스의 도시들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는 그리스어의 영향력이 상당히 낮았으며 오히려 오리엔트 지역의 공통 언어인 아람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B.C 2세기 초반과 A.D 2세기 후반 사이 콜키스와 이베리아는 모두 여러 이웃 국가들과 더불어 로마, 아르메니아, 폰투스의 단기 왕국들과 여러 흑해 연안의 주요 세력들, 그리고 각 지역 세력 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B.C 189년에 급속도로 성장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동부와 남부 지방인 고가레네(Gogarene), 타오키야(Taokiya)와 제니오 키야아스(Jenio Kiyaas) 뿐만 아니라 몇몇 다른 영토들도 정복하여, 이베리아 일대를 공격해 절반 넘게 차지했다. B.C 120~B.C 63년 사이에는 아르메니아의 동맹인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ridates VI Eupator)는 동부와 서부 흑해뿐만 아니라 전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포괄하며 콜키스의 전부를 정복하고 그의 왕국으로 합병시켰다.


이베리아는 아르메니아와의 단절된 관계로 인하여 같은 시기에 존속한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당시에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B.C 65년 이베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로마는 이베리아 전역에 그 지배력을 수립할 수 없었다. 이는 험준한 카프카스의 지세를 이용하여 이베리아 군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년 후에, 로마는 알바니아와의 전쟁 중에 작전상 교전을 벌이기 위해 B.C 36년 이베리아 군의 협조를 얻고 파르나바즈 2세의 군대와 합류하여 이베리아를 다시 지나가게 되면서 로마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에 아르메니아와 폰투스가 동부 지중해 전체의 점유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였고 로마는 이들의 분쟁을 착실하게 이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메니아-폰투스-이베리아는 마침내 대립을 잠정 종결하고 동맹을 맺었지만 이러한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부로부터 폼페이와 루쿨루스(Ruqulus)의 흑해를 비밀리에 항해하는 군사 작전과 더불어 남쪽으로부터 파르티아가 침략하여 이들 남쪽과 북쪽으로 공격을 받게 되자 가장 먼저 아르메니아가 로마-파르티아에게 항복하여 속국으로 양도되었다. B.C 63년에는 폰투스가 장악하고 있던 흑해 연안의 대부분을 로마군에게 패하여 상실했다. B.C 59년에는 폰투스 왕국이 로마에게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영토는 콜키스를 포함하여 폰투스의 속주로 로마 제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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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카프카스 부족들 : 초기 조지아의 국가, 콜키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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