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3편
방글라데시의 국부(國父)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 1920~1975)과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서막
동, 서파키스탄의 상황이 매우 극단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1971년 3월 7일 동파키스탄의 무지부르 라흐만 당수는 동파키스탄의 최대 도시인 다카에서 200만 명이 넘는 군중들 앞에 나와 연설을 하면서 벵골인들에게 대대적인 서파키스탄 정부에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게 된다. 무지부르 라흐만, 그는 다카 외곽의 파리드푸르(ফরিদপুর জেলা) 지역의 가난한 뱅골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31년 공립학교에 3등급으로 입학했으나 1934년 눈 수술로 인해 그만두었고 이후 수술로 인한 느린 시력 회복으로 일찍 결혼했다. 이후, 무지부르 라흐만이 쓴 돋보기 안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이후, 그는 1940년 전인도 무슬림 학생 연맹에 가입하면서 정치에 진출했고 캘커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1943년 전인도 무슬림 연맹에 참가하면서 중단된다. 1946년 이슬라미아 대학생 연합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학위를 취득하면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영국의 지배 하에 벵골인들의 처지는 녹록치 않았다. 인도인과 서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으나 벵골인들은 영국으로부터도 뿌리 깊은 차별을 받도 있었다.

그러한 벵골인들의 상황에서 무지부르 라흐만이 켈커타 대학을 떠나 동부 벵골로 돌아온 뒤 다카 대학에서 다시 법률을 공부해 동파키스탄 무슬림 학생 연맹을 설립하고 지방의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 다카 외곽의 가난한 집안의 벵골인이 이제는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벵골인들의 빈곤과 실업, 가난한 생활 등을 대변하여 사회주의적인 면모를 받아들였다. 무지부르 라흐만은 벵골민족주의를 사회주의와 융합하여 자신만의 정치 철학을 구축한 셈인데 차별과 가난에 시달리는 벵골인들에게 정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벵골인들인 무지부르 라흐만의 연설에 호응해 벵골안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지면서 동파키스탄 전체가 마비되었고 이 시점부터 동파키스탄은 사실상 서파키스탄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벵골인의 불복종 운동과 파키스탄 군의 유혈 진압으로 인하여 사태는 점차 내전으로 흘러갈 조짐이 보이게 된다. 이에 대응해 줄피카르 알리 부토와 야히야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 정부는 라흐만과 계속해서 협상을 이어감과 동시에 유사 시 대비해 군대를 동파키스탄으로 계속해서 증원하였다.
마침내 3월 24일에는 라흐만, 부토, 칸 사이에 3자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 회담 역시 결렬되었다. 이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라흐만이 비타협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 야히야 칸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단 주장도 있다. 야히야 칸은 라흐만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선빵을 때렸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라흐만은 그냥 하루빨리 독립을 선언하자는 측근들의 주장을 제어하면서 협상에 임하고 있었다. 1971년 3월 25일에는 야히야 칸이 다카를 비밀리에 떠나게되었으며 다카를 떠나면서 동파키스탄 총독 야쿠브 칸 장군을 티카 칸 중장으로 교체하는 한편 사태를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야히야 칸 자신은 벵골의 영토를 원하지 벵골인을 원하지 않는다며 다소 강력한 명령을 내렸다. 티카 칸 중장은 다시 파르만 소장에게 군사 진압을 지시했다. 파르만 소장은 방글라데시를 완전히 토벌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3월 25일 밤, '서치라이트 작전'이 개시되어 파키스탄 군이 방송국, 군부대, 다카 대학교, 라자바흐에 있는 방글라데시 경찰청 등 주요 시설을 총공격했고 수많은 벵골인들이 파키스탄 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파키스탄 군의 벵골인 학살은 마지막 대화의 여지마저 끊어버린 셈이 되었고 결국 서치라이트 작전 개시 다음날인 3월 26일, 오전 0시 30분, 라흐만은 치타공 방송국을 통해 정식적으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함으로 인해 동, 서파키스탄의 대립은 결국 내전이 되고 말았다.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한 이후 불과 1시간 후인 오전 1시 30분, 파키스탄 군은 마침내 라흐만을 체포하여 3일 후, 서파키스탄으로 압송했다. 야히야 칸 대통령은 동파키스탄 정당인 아와미 연맹의 해산을 선포하면서 라흐만을 파키스탄의 반역자로 규정했다. 이 서치라이트 작전은 원래 동파키스탄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블리츠 작전'을 확대한 것이었는데, 블리츠 작전은 무력 사용을 최소화하는 온건한 면이 있었던 반면, 서치라이트 작전은 무조건 보이는데로 죽이고 강간하며 파괴하는 엄청난 살육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공격은 대단히 갑작스러운 것으로 당시 동서 파키스탄을 주목하고 있던 미국도 당황하였으며, 특히 야히야 칸이 직접 날아와 라흐만과 협상한다는 말에 안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방글라데시 시민들에게는 엄청나게 위협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라흐만 당수의 동파키스탄의 독립 선언과 방글라데시의 건국, 그리고 이어진 그의 체포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서파키스탄의 지배와 차별에 스트레스를 받던 동파키스탄인들의 감정에 불을 지르는 결과를 가져왔고, 4월 10일, 방글라데시 임시 혁명정부가 수립되어 라흐만을 궐석 상태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하게 되는데 우선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사이예드 나즈룰 이슬람(Saiyed Najrul Islam)을 세웠다. 이어 이슬람의 뒤를 타주딘 아흐메드(Tajudin Ahmad)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며 M.A.G. 오스만니(M.A.G Osmani) 대령은 방글라데시 해방군 총참모장이 되어 방글라데시의 군을 총지휘했다. 이에 동파키스탄의 파키스탄 군 부대인 EBR(East Bengal Rifles)와 동파키스탄의 경찰들은 서파키스탄 통제에서 집단으로 이탈하여 묵티 파우즈(Mukti Fauz)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라는 독립군으로 개편되었다. 묵티바히니를 중심으로 방글라데시인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서파키스탄 관리들과 군인, 경찰 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편 사태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자 중앙 파키스탄 정부는 이에 놀라 즉시 군대를 동파키스탄에 파견해 진압에 나섰으나, 이미 사태는 묵티바히니 독립군과 서파키스탄 주도의 파키스탄 군 간의 전쟁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파키스탄 측은 라흐만 체포에는 성공했지만 동파키스탄 독립 세력 지도부 체포는 대부분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벵골 독립세력 지도부 분쇄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가 크게 우세했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에서 서파키스탄 군에 크게 열세였던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이들은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인들에게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하고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며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당시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 운동 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된 다카 대학에서는 파키스탄 군이 여학생 기숙사에 방화를 저지른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 탄압에 대해서는 큰 비판을 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독립에는 전세계 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으로 반응했다는 이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이 많은 고심 끝에 파키스탄에 대한 공격 및 지원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벵골의 현지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학살에 경악했으며 이들은 본국인 미국 행정부와 상원에게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보고 미군의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키스탄 측은 이러한 국제적 지지를 스스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집단 망명을 선포하면서 인도가 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었다. 인도는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국력도 쇠퇴할 것을 우려하여 크게 기대했지만, 인도 접경 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주목은 인도-파키스탄의 전쟁으로 인해 상호 간의 적이 되었디. 게다가 엄청난 인적 자원이 존재하는 인도 입장에서 또한, 수백만 명의 난민은 큰 부담이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종전시키는 비용이 더 저렴하게 먹힐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이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대부분 힌두교도들이기 때문에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되었다가는 학살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추방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물론 무슬림들의 많은 수가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했고,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 땅으로 피난을 갔다. 한편 이와 같은 동파키스탄의 게릴라 부대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해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의 인도 국경 폭격은 오히려 수피즘에 분노한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앙숙이었던 파키스탄을 멸망시키기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묵티바히니에 무기 및 보급 지원, 인도 영토 내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는 정도에 그쳤었지만 국경지대가 폭격 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된다.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어도 전혀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