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독립전쟁의 발단과 아타튀르크, 국가 통합의 시작
PKK의 무장해제는 핀치에 몰려 있는 에르도안의 정치적 입지를 다시 강화시킬 것인가?
매년 터키의 5월 19일은 공휴일이다. 이날은 주로 청소년 및 체육의 날(Gençlik ve Spor Bayramı)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는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일이면서 터키의 국부(國父)인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의 탄생일이기도 하다.
1918년 10월 30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가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승자인 연합국과 무드로스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은 일제히 소강 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무드로스 협정을 통해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고 더불어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결국 1918년 11월 12일 연합국은 코스탄티니예(현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장악했고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남부 아나톨리아 일대의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옛 비잔틴 제국을 회복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대그리스주의, 메갈리 이데아를 명분으로 유럽에서 트라키아 동부를 합병했고 코스탄티니예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에게 해를 건너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점차 분할되어 잠식되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으로써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분할 안에 따라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리고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지게 된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투르크인들에게 남아 있는 영토는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이 나누어 가지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 없는 치욕적인 조약이 체결되었다. 한편 치욕적인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만 제국 내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이든, 아니면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인 연합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리스 군이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어 있는 분할 안을 이양받기 위해 이즈미르에 상륙했고 1919년 5월 15일에 이를 취재하던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저항의 의미로 그리스 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리스 군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즉시 사살되면서 그는 터키 독립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산 타흐신의 저항적이고 영웅적인 행위, 그로 인한 사살을 목격한 이즈미르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침 남아 있던 오스만 제국 휘하 전직 병사들과 타 지역의 민간인들까지 자극했다. 5월 16일부터 시내 곳곳에서 하루 종일 무력 충돌이 벌어져 3,5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웅적인 움직임은 즉각 오스만 제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 된 코스탄티니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들이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 상태를 파악하는 등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 소극적인 저항을 벌였다. 일부는 연합국에 의해 압수된 오스만 제국의 병기와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넘기는 등, 애국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오스만 제국의 옛 군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체베소이(Ali Fuat Cebesoy)의 옛 오스만 제국의 퇴역병들이었다. 더불어 코스탄티니예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파디샤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바치던 장군들을 서구열강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면서 오스만제국의 행정력이 남아 있었던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를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메흐메트 6세의 입장에서 터키 독립군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괴롭히는 열강들을 몰아내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때 아주 위대한 젊은 장교가 나타나 터키를 구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다.
위기의 터키를 구한 그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었다. 1881년 지금의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해당하는 셀라니크(Selânik)에서 출생했다. 훗날 "터키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로 불리게 되는 케말의 정확한 출생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17년 테살로니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당시 공문서들이 상당수 소실되었고, 케말의 호적 또한 함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케말 본인은 1881년 5월 19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922년 10월 18일에 새로 작성된 아타튀르크 케말의 호적에 의하면 1881년 1월 4일 화요일에 출생한 것으로, 그리고 인상에 대한 묘사는 "중간 키, 푸른 눈을 가진 밀과 같은 (새하얀) 피부, 분류상 주어진 가족명은 탐(tam), (Orta boylu mavi gözlü buğday tenli alamet-i farika tam)으로 기재되어 있다. 케말의 아버지인 알리 르자 에펜디(Ali Rıza Efendi)는 알바니아계로 터키 아이딘 지역의 쇠케라는 곳에서 살다가 테살로니키로 이주한 세관 공무원이었다. 케말의 어머니인 쥐베이데 하늠(Zübeyde Hanım)은 슬라브족 혼혈이었다.
케말은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Selanik Askeri Rüştiyesi)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사대학(Mekteb-i Erkân-ı Harbiye)을 졸업한 후,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1911년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로 발령받았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 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 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방해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 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스타파 케말의 부대는 리비아에서 이탈리아군을 여러 차례 격퇴시키며 리비아를 수호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윈스턴 처칠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고 그는 일약 오스만 제국 내 신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이 공을 인정받아 케말은 메흐메트 6세의 총애를 받게 된다.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1919년 5월 16일 코스탄티니예를 떠나 4일 뒤인 5월 19일에 흑해 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이 날 케말이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인 반드르마 호가 항구를 벗어나자마자 공해상에서 터키의 국기인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케말은 혁명을 선언했다.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장악한 상황이었고 오스만 제국의 정부는 케말의 배신을 파악하고 궐석 재판에서 케말을 사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따라서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 삼순에 상륙한 1919년 5월 19일은 터키 독립운동의 발단일이 되면서 현재는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주일 전인 12일, 터키 동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PKK가 조직을 해체하고 터키 정부를 상대로 전개했던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전격 선언한 것이다. 무려 40년 동안 PKK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터키 남동부의 독립 국가 수립 또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벌여 왔었다. 지금까지 무력 충돌로 4만 명 넘게 사망했으며 터키와 서구는 PKK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런데 PKK가 갑자기 무력투쟁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크게 예측되는 이유는 대통령인 에르도안의 정치적 역량이 그가 집권한 이래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에르도안은 경제 부흥에 실패했다. 미국의 제재 등으로 인해 인플레가 심화된 터키는 팬데믹까지 겹치며 4년 동안에 물가가 무려 400%나 폭등했다. 지금 필자는 업무차 터키를 돌고 있는데 체감하는 물가는 가히 서유럽 못지 않을 정도다. 필자와 같은 업무상이지만 여행자나 다름 없는 신분도 그렇게 느꼈을 정도니 현지인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스탄불의 시장인 에크렘 이마모을루를 부패 혐의로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터키 내에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여러 상황에서 에르도안에 대한 기류가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럴 때 정치적 분위기를 전환하는 것이 지지율 회복에 도움이 된다. 여당인 정의개발당(AKP)과 연대하는 민족주의 행동당(MHP)의 데블레트 바흐첼리 대표는 PK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과 협상을 했다. 외잘란은 1999년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았었는데 외잘란에게 그가 조직을 버리고 폭력을 멈추겠다고 약속하면 사면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으면서 외잘란이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PKK의 투쟁이 쿠르드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혁파하고, 쿠르드족 문제를 민주적 정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려놓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PKK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며 조직구조를 해체하고 무력투쟁을 끝낼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면서 PKK 해체 과정을 설립자인 압둘라 외잘란이 주도 및 관리를 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에르도안은 PKK의 무장을 해제했다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로써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밝은 전망이 생기면서 오늘 PKK의 대표들이 아타튀르크의 영묘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를 방문해 헌화했다. 이는 좁아졌던 에르도안의 입지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을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외잘란의 사형을 언도한 이래, 현재까지 약 26년 동안 집행을 연기했던 것은 에르도안이 어느 중요한 상황과 순간에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에르도안과 외잘란의 사법거래,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서 터키 국가 통합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인 사건을 수면 위로 돌출시키면서 축소되었던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끌어들이려는 정치 책략이 놀라울 따름이다. 과연 에르도안은 자신의 좁아진 입지를 회복하고 터키 국가 통합을 주창하면서 터키 동부 지역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