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0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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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폭격으로 주저 앉은 옛 국무부 건물이 있는데 세르비아 보수 민족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은 파과된 이 건물을 보며 나토와 미국에게 당한 치욕과 아픔을 상기하여 담벼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ВОЈСКА НА КОСОВО ВРАТИ" (우리 군대는 코소보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세르비아인 기원의 聖地인 코소보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이같은 사태의 비극적 배경은 발칸전쟁부터 양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발칸 전쟁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년 동안 발칸에서 전쟁이 없는 때는 거의 없었다. 이것이 발칸이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는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지만 러시아보다도 한참 늦은 서구화는 과거 서유럽보다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동유럽-발칸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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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 코소보 전쟁 당시 나토의 폭격으로 주저 앉은 옛 국무부 건물 담벼락에 써 있는 문구, "ВОЈСКА НА КОСОВО ВРАТИ" (우리 군대는 코소보로 돌아갈 것이다.),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역사의 아이러니는 흔히 여기서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당겨 발생시킨 것은 세르비아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가브리엘로 프란시스가 사라예보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함으로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이야기의 중심은 당연히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결 구도로 가야한다. 그러나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 쓰여지고 강대국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역사의 중심은 그저 오스트리아를 도왔던 독일과 서방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주인공, 주역은 세르비아나 오스트리아인데 조연인 독일과 영국, 프랑스, 엑스트라인 미국이 주목을 받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모두들 독일과 서방의 대결로만 기억한다.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맞대결에 대해서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발칸, 동유럽이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어떻게 항전했는지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그래봤자 황태자 부부 암살 이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동유럽-발칸도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전투였다. 


지독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참전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세르비아 연방, 루마니아, 그리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가 연합국 측에 가담했고 터키, 불가리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세르비아의 객관적 전력은 오스트리아에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영국의 지원을 받았고 발칸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주로 게릴라전 위주로 오스트리아와 항전해나갔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라는 강대한 토대가 구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나 다른 발칸 국가들은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싸워 이기고 갓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가들이 많은데다 그마저도 근대식 통치 방식을 이제 막 도입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즉, 발칸 각 국가들의 형세는 19세기 말 열강의 틈에 둘러싸여 근대식 방식을 막 도입한 대한제국과 다를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다른게 있다면 이들 뒤에는 러시아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우군이 될 나라가 없었다. 어쩌고 보면 간단한 차이지만 그 하나가 모든 것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 엄연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약소국인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맞아 싸웠지만 전면전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세르비아의 대패와 세르비아 영토의 함락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무기는 영국의 지원도 있었고 일부 러시아의 지원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민족적 자존심에서 우러나온 저항심의 발로였다. 반항아 기질의 세르비아는 19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했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도 큰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오스만투르크도 수백 년 간 간신히 길들였었는데 오스트리아가 갓 정복했다고 세르비아가 고개를 숙일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세르비아의 게릴라 군은 오스트리아, 독일 남부 전선 연합군에 늘 기습 공격을 감행해 피해를 주었다. 그러한 기습 공격은 오스트리아의 보복이 항상 뒤따라왔다. 오스트리아의 보복은 대학살이었고 세르비아 주민들은 학살과 기아로 인해 약 200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로 인한 이재민과 피난민도 발생했고 그나마 전쟁이 없는 동맹국인 러시아로 향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발칸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이후 피의 지옥을 딛고 요시프 티토가 등장한다. 티토가 내세운 티토주의 이데올로기는 남슬라브의 기조가 세르비아라는 자존심에서 나온 발로였다. 


실제 남슬라브계 민족들 구성 분포들을 보면 굉장히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 통합하여 민족정신을 강조한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영원한 대통령 요시프 티토다. 각기 종교도 다르고 민족도 세세히 구성원을 따져보며 엄연히 서로가 달라 보였던 남슬라브를 유고를 중심으로 하나로 융합한데 성공한 것은 단일민족으로 보장된 세르비아 만의 남슬라브가 아니라는 티토의 사고에서 나왔다. 티토는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가 대표적인 남슬라브의 정통이 아니라 불가리아까지 포용해 같은 슬라브어권이고 발칸에서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는 점, 민족들의 풍습이나 민속에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 비록 역사에서 서로 반목하는 모진 풍파가 있었지만 결국은 정치적 이념에서 부딪친 것 뿐이지 모두 같다라는 점을 강조시켰다.


그렇게 모든 발칸 슬라브인을 하나로 묶었다. 그래서 종교는 무신의 상징이고 종교보다는 민족이 우선이다라는 기치를 내세운다. 그렇게 융합된 민족 정책을 "티토민족주의" 라고 부른다.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정책을 소련에게서 독립에 성공한 티토는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어 "티토주의" 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다. 티토는 이렇게 세상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발칸 슬라브를 하나로 묶었다. 그러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미, 소 냉전의 G2 체제에서 미, 소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일명 제3국이라는 체제가 확립되고 일약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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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를 탈환하고 싶어하는 세르비아인들, "발칸의 화약고"가 된 유고슬라비아와 티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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