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캔버스에 사물을 축소해 화려하게 표현하는 이슬람 세밀화는 회화가 발달하지 못했던 이슬람 미술사의 백미로 불린다. 신神이 아닌 인간이 형상을 창조하는 행위를 금기시했던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고도로 상징화된 문양과 다양한 서예 기법이 발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구체적인 건물과 동식물은 물론 인물까지 세밀하게 묘사해 낸 이슬람 세밀화는 매우 예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상 표현에 대한 무슬림들의 두려움은, 실제로 『꾸란』에 근거했다기보다는 감히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는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부인 아이샤가 동물이 장식된 걸개를 집에 장식하자 불같이 화를 내었지만, 아이샤가 그 걸개를 방석으로 만들자 흡족해했다고 한다. 즉 생명을 묘사하더라도 그것이 숭배나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분명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면 형상 표현의 금기는 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이 무슬림들의 삶 전반에 끼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이슬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형상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예술에서는 일반적으로 모스크 건축이나 코란의 필사와 같은 종교의 영역과 왕궁의 건축이나 서책과 같은 세속의 영역이 구분되었으며, 세속의 영역에서는 그 쓰임에 따라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대상의 묘사가 가능했다. 용도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은 이슬람 미술에서 독립된 조각이나 회화가 등장하지 못하는 제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슬람 미술가들에게 형상 창조의 자유를 선사한 가림막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슬람 미술의 모순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가 이슬람 세밀화이다. 인물을 묘사하는 행위에 대한 교리적 해석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회화는 열렬히 숭배받기도, 때로는 훼손되거나 심지어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순과 긴장 속에서 이슬람 세밀화는 매우 독특한 자신만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1335년, 일한국이 몰락하면서 이슬람 세밀화는 지방정권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발달했다. 특히 인주왕조(1335~1357)의 수도였던 시라즈가 대표적이었다. 시라즈에서는 타브리즈의 궁정양식과 전혀 다른 전통적인 세밀화가 발달하였다. 시라즈의 세밀화에서는 중국의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노랑, 파랑, 빨강 등 원색을 다채롭게 배경에 사용하고 구성은 단순하다. 선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거대한 꽃으로 공간을 채우는 등 왕실 공방에서 벗어난 독창성을 보여준다. 이후 인주 왕조가 무자파드 왕조(1335~1393)에 점령되면서 시라즈 세밀화에는 무자파드 양식이 나타난다. 수평선은 높고, 둥근 산맥 위에 하늘은 짙은 푸른색으로 채색되었다. ‘쿨라’라고 불리는 무자파드 특유의 터번이 등장하며 인주 시기와는 다르게 작고 세밀한 초목이 촘촘하게 그려진다. 말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작고, 사람은 반대로 머리가 크게 표현되었다.
눈과 입은 비교적 작게 그리고 수평의 뾰족한 콧수염을 더해서 무자파드 양식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잘라이르 왕조(1336~1432)가 있었던 바그다드에서는 14세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시인 크와주 케르마니가 쓴 세 편의 시의 필사본에 포함된 10편의 삽화가 가장 유명하다. 섬세하게 장식된 복식을 입은 우아한 주인공들은 치밀하게 구성된 자연물과 건축물에 둘러싸여 있다. 세심하게 묘사된 다양한 초목은 화면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 필사본의 몇몇 삽화에는 화가 주나이드의 서명이 남아있는데, 이는 과거 서예가들만 주목하던 것과 달리 이슬람 미술사에서 회화와 화가의 지위가 상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특히 오스만의 궁정화가 레브니(Levni)가 유명한데 그는 오스만 제국(Osmanlı İmparatorluğ u)의 에디르네(Edirne)에서 태어났다. 레브니의 본명은 압두셀리 첼레비(Abdülcelil Çelebi)이며, 색의 다채로움을 의미하는 '레브니'라는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레브니는 어린 시절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스탄불에서 레브니는 초기에 음악과 시를 공부했으나 이후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톱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의 작업장에 들어가 테즈힙(Tezhip)을 배우고 테즈힙 예술가로 일했다. 테즈힙은 책의 표지와 한 챕터의 다음 장을 식물 모티프와 기하학적인 모티프로 장식하는 이슬람 미술의 한 종류이다. 테즈힙은 금과 선명한 채색을 써서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레브니는 술탄 무스타파 2세(Mustafa II)가 집권한 1695년과 1703년 사이에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레브니는 무스타파 2세가 사망하고 술탄 아흐메드 3세(Ahmed III, 재위 1703년~1730년)가 집권한 이후에도 계속 궁정화가로 일하였다.
레브니는 오스만 제국의 궁정화가로서 디미트리 칸테미르(Dimitri Kantemir)가 집필한 오스만 역사서의 세밀화(Miniature)를 제작했으며, 무스타파 2세 이전에 통치한 군주 21명과 무스타파 2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밖에도 레브니는 무스타파 2세의 사후에 제작한 '무스타파 2세의 사후 초상'(Portrait posthume de Mustafa II, 18세기경)을 남겼다. 레브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톱카피 궁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시인 세이드 베흐비(Seyyid Vehbi)가 쓴 산문집인 '술내임-베흐비1세'(Surname-i Vehbi: 술내임은 술탄의 자녀들과 관련된 축제를 주제로 한 문학 장르를 뜻함)에 실린 세밀화가 있다. 이 세밀화들은 1720년에 있었던 아흐메드 3세의 네 아들의 할례를 기념하는 15일간의 축제를 날짜순으로 묘사하고 있다. 레브니는 자신의 필명에 걸맞게 아주 다양한 색을 써서 인물 군상과 지물들을 표현했으며, 몇몇 세밀화에는 원근법을 적용하였다.
16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의 궁정 화원에서는 어떠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이야기에 알맞은 그림을 촘촘하게 그려내는 ‘세밀화’가 공식적이고도 전통적인 화풍으로 인정받았다. 이 그림들은 마치 신이 인간세계를 바라보듯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신의 관점’에 입각한 화폭 구성에 따라 대체로 평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이끌어간 것은 이슬람 세밀화의 대가 ‘비흐자드’를 중심으로 하는 ‘헤라트 파’였다. 한편 같은 시기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서는 르네상스가 만개했고, 이는 회화에 있어서도 ‘원근법’이라는 ‘인간중심적인 시각’에 입각한 새로운 화풍을 유행시켰다. 그리고 이 유럽의 화풍은 오스만 제국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쳐서, 심지어 술탄마저도 그에 매혹되어 유럽의 화풍을 좇았으며, 이로 인해 실제로 유럽의 화가가 이스탄불의 궁중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 세밀화의 시초는 15세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파티흐 술탄(1432~1481, 오스만 제국 제7대 술탄) 시기에 이르러 독특한 스타일을 갖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책 속에 술탄의 초상화가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셀주크 투르크 시기처럼 술탄, 귀족 등의 후원자들은 궁전 근처에 화원을 만들어 세밀화가들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세밀화는 궁중화원(나카시하네)에서 제작되었다. 나카시하네는 궁중의 장인단(匠人團)에서 가장 중요한 분파였다. 화가들은 수사본에 삽화를 그리거나 채색하는 일만 맡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책 장정과 예술품에 장식을 그려 넣는 일도 했고 중전이나 종교 건축물의 천정과 돔을 장식하는 그림도 구상했다. 또한 도자기 제조인이나 직물과 양탄자를 만드는 작업장에도 장식 문양의 밑그림을 제공했다. 나카시하네의 이러한 주도적인 역할 덕분에 이스탄불에서 제작된 수사본이든 이즈닉의 도자기든 부르사의 벨벳이나 비단이든 간에 오스만 예술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식은 유사성을 띠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