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에서는 1965년 3월에 게오르기우데지가 사망하고 당 제1서기의 후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șescu)가, 국가 평의회 의장의 후임에는 키부 스토이카(Chivu Stoica)가 각각 취임했다. 그 중에서도 차우셰스쿠는 게오르기우데지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1954년에 당 서기에 올랐으며 다음 해에 정치국원에 임용되고, 수년 동안 당 조직 문제의 책임자로서 지위를 견고히 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독자적 경제 건설, 민족주의적 입장, 신중한 민주화라는 '게오르기우데지 노선'을 계승하면서, 당내와 외교의 양면에서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차우셰스쿠 노선을 확립하게 된다. 이와 같은 희대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1918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였던 남부 스코르니체슈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차우셰스쿠에게는 1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 안드루처(Andruță)는 3헥타르의 경작지와 양 몇 마리만 가지고 있던 가난뱅이였다. 그와 같이 가난했기 때문에 차우셰스쿠의 부모님은 농사 이 외에도 마름질을 하면서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 차우셰스쿠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리나(Alexandrina)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집안 출신이었던 반면에 아버지 안드루처는 자신의 아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990년대 후반 희대의 독재자들을 모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었던 BBC가 차우셰스쿠를 조명하기 위해 그의 고향인 스코르니체슈티를 방문해 그와 그의 부친인 안드루처를 알고 있다는 한 정교 신부를 인터뷰한 바 있었다. 신부는 차우셰스쿠의 아버지에 관해 "자기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도둑질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싸워서 다치기 일쑤였던 인물." 이라 하였다. 차우셰스쿠가 희대의 광기 어린 독재자가 된 이유는 이와 같은 불우한 어린 시절의 환경적인 요소도 분명 자리했을 것이다. 유년기 차우셰스쿠의 집은 10명의 형제와 부모가 함께 살기에는 매우 공간이 협소했다. 방은 겨우 2칸이었으며 루마니아의 전통음식인 옥수수죽으로 알려진 머멀리거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차우셰스쿠는 마을에 있는 한 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도 역시 루마니아 시골의 어려운 삶과 같이 별로 좋지 못했다. 해당 학교의 선생님은 한 교실에서 동시에 여러 반의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차우셰스쿠는 책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학교에는 거의 맨발로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10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고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이었는지 차우셰스쿠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없었으며 성격 또한 거칠고 내성적인 면을 자주 보였다고 그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사람들이 증언했다.
차우셰스쿠는 11세에 부쿠레슈티로 갔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증언하기로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고향에서 도망쳤다고 했지만 대체로 아버지인 안드루처가 알코올 중독자로 가족을 학대하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보통 광기 어린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1. 집안 환경이 불우했고, 2.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3. 아버지가 주정뱅이에 가족들에 심하게 폭력적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한 환경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 권력이 정점이 되었을 때 내제되어 있는 그 불만들이 폭발하는 것이다. 이 조건들에 부합했던 것은 히틀러도 그랬고 스탈린도, 게오르기우데지나 체코의 노보트니, 북한의 김일성, 차우셰스쿠, 심지어는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집안 자체가 그러했었다. 우선 차우셰스쿠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차우셰스쿠는 숙모인 니쿨리나 루세스쿠(Niculina Rusescu)와 함께 살다가 신발 공장에 취직해 수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루마니아 공산당(PCR : Partidul Comunist Roman)의 열성당원이었던 알렉산드루 선둘레스쿠(Alexandru Săndulescu)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그러자 선둘레스쿠는 차우셰스쿠를 비밀 임무를 띈 수습생 형태로 취직시켜 주었다고 한다.
1932년에 차우셰스쿠는 마침내 루마니아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루마니아 공산당은 루마니아에서 불법 단체로 인정되었던 데다가 아직 10대였던 차우셰스쿠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일들만 맡겨질 뿐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그와 같은 잡일은 당시 루마니아 왕국으로 볼 때 매우 불법적인 일들이었다. 그러던 중 차우셰스쿠는 1933년 일련의 파업들을 주도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1933년 첫 번째 체포 이후 차우셰스쿠의 감옥 생활이 시작된다. 이듬 해인 1934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감된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석방 탄원서에 시민들의 서명을 받다 체포되었는데 차우셰스쿠는 이와 같은 활동을 두 번이나 더 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는 1930년대 중반까지 수도 부쿠레슈티 이외에도 크라이오바, 큼풀룽그, 름니쿠 블체아 등 루마니아의 여러 도시들에 파견되어 공산당과 관련된 임무들을 수행하였으며 수 차례에 걸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활동들과 잦은 수감생활로 인해 루마니아 정부 당국은 차우셰스쿠에 대하여 공산주의 프로파간다와 반(反) 파시스트의 활동적인 보급책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그를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여기게 되었다.
이 때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차우셰스쿠와 같은 방에 수감된 감옥 동기가 있었는데 이 동기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차우셰스쿠는 교도관들 사이에서도 독종으로 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교도관들의 폭행에도 비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하며 교도관들이 폭력과 고문으로 죄수들 통제하는 방법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 동기도 차우셰스쿠에게 루마니아 민중의 분노를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가 독살당할 뻔하자 해외로 망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차우셰스쿠는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공산당을 위한 지하활동을 위해 잠시 자취를 감추었지만, 1936년 6월 6일 브라쇼브의 법원으로부터 또 다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도프타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차우셰스쿠의 후원자인 블라디슬라브 타르노브스키(Vladislav Tarnovski)의 집에서 그가 거주했었는데 여기에서 발견된 루마니아 정부에 대한 반란과 봉기를 선동한 전단지가 발견되었고 국가 전복 혐의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차우셰스쿠를 기소했던 검사의 기소장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피의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사실상 유죄 1936년 1월 15일 고의적이며 사기성이 짙은 의도를 가지고 자극적이고 비밀스런 책자를 소지했으며 그것들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려 하였고 시민들에게 사회 투쟁을 유발하려 한 점에서 고의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구두 수선공의 수습생이었지만 당시 유행을 타기 시작한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차우셰스쿠는 반(反) 정부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감옥을 자기 집처럼 왕래했을 정도로 수감 생활이 화려했으며 일명 대단한 빨갱이였다. 이 때에 감옥에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에 더욱 심취하였고 고등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의 내용을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그러던 중 같은 노동자 출신인 엘레나와 만나 결혼하면서 더욱 경도되었다. 이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총애를 받아 그의 심복이 되면서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 된 이후 여러 직책을 거치다 초대 서기장이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말년에 심각한 의심병으로 인해 차우셰스쿠만 믿게 되면서 그는 서서히 권력을 잡아 루마니아 정계 2인자로 올라섰고 1965년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