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라트 계통 준가르 인들이 인종 청소당하며 신강 지역 북부가 공백지가 되자 청나라 조정은 한족 죄수들과 동쪽의 감숙성에 있던 회족(回族) 농민들, 남쪽 타림 분지에 있던 위구르 족 농민들을 공백지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준가르 제국의 거점 중 토지가 비옥하고 수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우루무치는 회족과 한족들의 이민 정착 거점이 되었다.

청나라는 사민 정책 이 외에도 범죄자를 호주 등의 식민지로 보낸 영국과 같이 중범죄자들을 우루무치로 유배를 보내 개척을 명하게 하기도 하였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가리아로 지방으로 대거 추방당한 시버 족(錫伯族)이나 살라르 족(撒拉族)이 중요한 예시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청나라는 유목민 세력이 신강 지역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목초지를 대규모로 개간하는 사업을 벌였고 그 결과 신강 지역의 경작지가 대거 확충되었다. 만주족 팔기군이 한족이나 회족 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은 것과 다르게 시버 족들은 쿨자 인근에서 직접적으로 둔전을 일구어야 했다. 원래는 시버 족 이 외에 다른 팔기군들도 만주족의 기인이 아닌 이상 둔전을 직접 경작해야 했으나, 몽골 팔기군이나 한족 녹영은 둔전을 불법으로 민간인들에게 임대시켜서 경작을 대신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는 일리 지역을 중심으로 팔기군을 주둔시켰다. 4~5만 명 정도 규모의 팔기군은 대개 신강 북부 지역과 과거 준가르 제국의 중심인 지역에 집중 거주했는데, 이는 타림 분지 남부에 있는 위구르 무슬림들과의 충돌을 예방하고 러시아에서부터 돌아온 칼믹 족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오이라트의 일파 중 노가이 칸국을 정복했던 토르구트 인들이 주축이 된 칼믹 족들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이 처음과 다르게 군역을 점점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부과하자 15만 명 정도가 다시 신강 북부 지역으로 귀환했는데, 오늘날의 광대한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긴 귀환 여정 동안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원을 받는 카자흐 칸국의 카자흐 유목민들이 칼믹 족을 습격하며 복수했다고 한다.
카자흐 유목민들은 칼믹 족의 친척인 준가르 인들이 많은 카자흐 족들을 노예로 삼았던 역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 족에 대한 복수가 아니더라도 칼믹 족들이 카자흐 초원 지역을 평화롭게 통과하게 지켜만 보고 있을리 또한 만무했다. 한편 위구르에 대한 청나라 정부의 회유 차원에서 위구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타림 분지의 경우, 한족의 정착을 엄격히 금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조치가 풀리게 된 것은 자한기르 호자의 반란 이후부터이다. 청나라가 정복하기 이전의 신강은 이미 위구르 족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 족과 카자흐 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으며, 청나라의 정복 이후에는 회족들이 대규모로 정착하여 신장 북부를 개간했다.
이는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위구르 족들만의 영역이 아니며, 키르기스 족들과 회족들도 정당한 지분권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더군다나 청나라는 준가르 제국의 압제로부터 위구르 족들을 해방시켜 준 입장이며, 단순한 침략자라고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이러한 민족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두 민족 중 준가르 인들은 거의 멸족된 상태이며 만주족들은 신강 지역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청나라 정부에 저항할 강력한 세력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동투르키스탄이 어느 민족의 영토인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귀속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