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0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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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가 우세했다. 그러나 묵타비하니는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 데다 파키스탄 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했다. 묵타비하니는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 전으로 파키스탄 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군은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각종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다. 이 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했으며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약탈하거나 불태우고 수많은 농민들을 학살했다. 이에 파키스탄군의 만행에 저항하기 위해 동파키스탄 다카 대학교에서는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운동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되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파키스탄 군이 다카 대학에 진입하는 도중 여학생 기숙사를 방화한 후, 탈출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화면 캡처 2025-05-27 202110.png
사진 : Crowds cheer the acting Bangladesh president and the acting government during a mass meeting in Jessore, East Pakistan on Dec. 11, 1971, 출처 : AP Photo

 

개전 당시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 사회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비록 동부 벵골 지역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 큰 비판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동부 벵골 지역 독립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는 이점도 존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고민 끝에 파키스탄을 제어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사실상 동파키스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벵골의 현지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 군의 살육과 각종 만행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서파키스탄 정부를 비난하고 미국 본국에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지만 당시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핸리 키신저는 이미 서파키스탄의 승리로 끝났다고 보아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측의 만행이 더욱 심해지자 이러한 서파키스탄의 만행에 대해 국제적으로 심각히 우려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올라온 서파키스탄 측의 잇달은 전쟁 범죄 유엔 보고들은 국제 사회의 서파키스탄에 대대한 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파키스탄 군의 살육 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피난오면서 인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인도는 이미 파키스탄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끼리 내전을 치르는 동안 양 파키스탄의 국력도 약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이 점점 인도 접경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인도 국경 근처에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인도 입장에서도 신경이 곤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구가 많은 인도 입장에서 서파키스탄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 명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에 큰 부담을 느껴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해 두 나라를 갈라 서게 만들고 전쟁을 빨리 종전시키는 것이 낫다는 예측을 내놓게 된다. 게다가 그 방법이 난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효율적이라는 계산도 이미 서 있었던 상태였다.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하필이면 대부분 힌두교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추방하는 것은 파키스탄에서는 학살당할 것이 뻔했고 국내에서는 같은 힌두교도들을 차별한다는 좋지 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무슬림들도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목표는 같은 무슬림이 아닌 그나마 인종청소에 부담이 적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겨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이간질의 배경에는 인도 정부가 있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표적 학살에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로 피난을 갔던 것이다. 한편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이 적지 않은 성과를 내자 당황한 파키스탄 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기 위해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한 대대적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키스탄 군의 인도 국경에 대한 폭격은 오히려 인도 정부의 분노를 불러와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앙숙인 파키스탄을 분열 및 소멸을 위해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묵티바히니에 무기를 보급하여 지원하는 것과 인도 영토 내 묵티바히니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군에 의해 국경지대가 폭격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했다. 당시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1917~1984)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면서 참전을 천명했다. 이는 서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전황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군인 미트라 바히니(Mitra Bahini, মিত্রবাহিনী)와 파키스탄 군 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부터 종전까지 벌어진 전투를 두고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명명되었으며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게 된다. 12월 4일 새벽, 인도 해군이 먼저 서파키스탄에 대한 기습 작전을 수행하게 된더. 소련제 오사급 고속정들로 구성된 인도의 함대가 서파키스탄 최대 도시인 카라치를 급습해 파키스탄 해군 구축함 하일바와 소해함 무하피즈를 격침시키고 구축함 샤 자한을 대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인도의 오사급은 남은 П-15 «Термит» 대함 미사일들을 항구를 향해 발사해 유조선 1척을 격침시키고 유류저장고를 격파함으로써 파키스탄의 전쟁 수행 능력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에도 인도 해군의 오사급은 12월 8일과 9일, 양일 간에 추가적인 기습공격을 수행하여 파키스탄의 예비 연료 창고까지 격파하고 상선 4척을 격침시켜 파키스탄의 물류망을 마비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파키스탄 공군이 인도 해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공격을 수행했으나 오히려 자국 해군의 줄피카르 호위함을 오폭하여 장교 여러 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분노한 파키스탄 해군은 프랑스제 다프네급 잠수함 한고르를 보내 인도 해군의 14형 호위함 쿠크리를 격침시켰고 이에 승조원 194명이 사망했다. 이는 당시 인도 해군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한편 항공모함 비크란트가 이끄는 항모전단이 전개되어 호커 시호크 함재기들이 동파키스탄 해안의 군사 거점들을 폭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동파키스탄의 항구와 비행장을 비롯한 전략거점들이 모두 파괴되어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파키스탄 군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된다.


파키스탄 해군은 텐치급 잠수함 가지를 보내어 대응했지만 갑자기 스스로 유폭되어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당시 파키스탄 잠수함이 스스로 유폭된 이유에 대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결국 파키스탄 해군은 인도 해군에게 해군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면서 처절하게 대패했다. 이 때부터 성공적인 항모전단 사용법을 터득한 인도군은 이후에도 꾸준하게 항공모함 세력을 유지하면서 해군을 보강하게 되면서 남아시아 최강의 해군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는 하늘에서도 끝없이 이어졌다. 12월 3일 금요일 17시 30분경, 파키스탄은 해군보다 앞서 공군을 먼저 움직여 칭기즈칸 작전을 통해 국경 지대의 주요 인도 공군 기지들을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F-86과 B-57을 동원해 폭격에 나섰지만 인도 공군이 입은 피해는 활주로가 손상되는 수준 정도였고 인도 공군은 큰 손실을 입지 않은 채, 활주로를 복구하며 반격을 가하게 된다.


12월 4일, 인도 공군의 MiG-21 전투기들은 다카에서 파키스탄 공군과 공중전을 벌였다. 인도 공군은 F-86 2대를 격추하고 공습을 통해 다카 비행장의 기반 시설들을 타격하는데 성공했다. 인도 공군의 호커 헌터와 Su-7도 동파키스탄의 주요 군사적 거점과 CAS에 동원되었지만 파키스탄 군의 반격으로 인해 호커 헌터 6대와 Su-7 1대를 잃었다. 공중전과 공항, 공군 기지들에 대한 폭격이 계속되자 UN은 외국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다. 이에 외국 민간인이 공중회랑을 통해 안전하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UN의 권고에 의해 하루 동안 양측 공군은 휴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12월 6일에 다시 공중전은 격화된다. 인도 공군 MiG-21들은 파키스탄 공군 테즈가온 공군기지를 활주로 파괴 폭탄을 떨구어 무력화시켰고 후속한 호커 헌터들이 네이팜탄으로 테즈가온 기지를 타격해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후에도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공군기지를 지속적으로 맹폭했으며 파키스탄 공군은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공군기를 띄워 대응하기가 어려워졌다. 공중전 전역에서도 인도 공군은 17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동파키스탄 공군은 3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이는 동파키스탄 공군이 선전했고 초기에는 파키스탄 군이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숫적 열세를 동파키스탄 공군이 극복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인도 공군이 공중전 또한 서파키스탄 공군을 직접 맞붙는 상황이 되었다. 한편 육상에서도 12월 8~14일에 걸쳐 카슈미르 투르툭(Turtuk)에서 인도-파키스탄의 지상군이 혈투를 벌이게 된다. 인도군은 파키스탄령 길기트 발티스탄의 동남쪽 국경 마을에 위치한 투르툭을 완전히 점령하게 된다. 투르툭 주민들 대부분이 무슬림들이었고, 시아첸 빙하의 남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동파키스탄에 진주한 지상군을 지원해야 하는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매우 결정적인 손실이었다. 이처럼 동부 지역과 서부지역에서 파키스탄은 인도와 약 2주일 동안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양분화 된 전선은 서파키스탄에게 불리함으로 작용했고, 카슈미르 투르툭을 잃으면서 동파키스탄에서 격전을 벌이던 서파키스탄 지상군에게 전달할 보급이 어려워졌다. 결국 UN의 중재로 1971년 12월 16일 서파키스탄 군 지도부가 마침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파키스탄의 패배를 막을 내리게 된다. 다만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갈등은 1972년 심라 협정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봉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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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서파키스탄의 분리와 인도 사이에 상호 적대국이 된 계기 -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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